블라드 3세 체페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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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통치와 유배(1456-62) ==
[[1447년]] 12월 헝가리 [[보야르]]들의 섭정 [[야노슈후녀디 후냐디야노시]]가 블라드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벌테니]] 근처 습지에서 그를 살해했다. 블라드 2세의 장자이자 후계자였던 [[왈라키아의 미르차 2세]]는 뜨거운 인두로 눈을 잃고 [[트르고비슈테]]에서 생매장을 당했다.
 
왈라키아를 헝가리가 차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오스만은 왈라키아를 침공했고 어린 블라드 3세를 즉위시켰다. 그 통치는 훈냐디가 왈라키아를 침공하면서 짧게 끝났고 그의 동맹이였던 [[더네슈티 가문]]의 [[왈라키아의 블라디슬라브 2세]]를 즉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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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Theodor Aman - Vlad the Impaler and the Turkish Envoys.jpg|thumb|left|블라드 공과 터키인 사절. [[테오도르 아만]]작 ]]
 
1459년에 [[교황 비오 2세]]는 [[만투아 공의회 (1459년)|만투아 공의회]]에서 오스만을 상대로 십자군을 소집하였다. 이 십자군에서는 헝가리의 국왕이자 야노슈후녀디 후냐디의야노시의 아들인 [[머티어시 초르비누시]]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여파로 초르비누시는 교황으로부터 금화 4만냥을 받게 되는데, 이 가치면 12,000명의 육군 병력을 모으고 10척의 다뉴브 전투선을 구입하기에 충분한 금액이였다. 이 전쟁에서 블라드 3세는 오스만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머티어시 초르비누시와 동맹을 맺었다(왈라키아는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일부라는 주장을 당하고 있었다).
 
1459년 말에 메흐메트 2세는 블라드 공에게 사절을 보내어, 1만 두캇의 조공과 오스만군에게 500명의 병력을 보내라는 요구를 하였다. 블라드는 만약에 그가 당시에 세금이라고 불리는 조공을 받친다면, 그것은 왈라키아가 오스만 제국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의미이기에 거부하였다. 그의 대부분의 전임자들이나 계승자들처럼, 블라드는 왈라키아의 독립을 주요 목표로 삼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