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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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루터파 이단으로 인해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카를 5세 황제는 루터가 죽던 해인 1546년 루터파에 가담한 제후들을 치기 위해 거병하였다. 당시 모든 정치적인 문제는 종교적 문제와 분리되지 않았다.<ref>1546년 카를은 누이인 마리에게 전쟁의 이유에 대해 말하였다. "우리가 지금 가로막지 못한다면 독일의 모든 나라들이 신앙 문제로 깨어지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나는 헤센과 작센에 대해 브룬스비크 대공과 그 영토를 침략하여 평화를 파괴하였다는 이유로 전쟁에 돌입하지만 이런 구실은 결국 문제가 종교에 있다는 사실을 오래동안 감추지는 못할 것이다." Terry, Arthur in Mulryne, J. R. and Shewring, M, eds., War, Literature and the Arts in Sixteenth-Century Europe, London, 1989 (Hale, John, The Civilization of Europe in the Renaissance, 1994에서 재인용)</ref> 1547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황제 군이 대승함으로써 루터파 제후들로 이루어진 쉬말칼덴 연합은 궤멸되었다. 이 전쟁에서 작센의 모리츠는 사촌 요한 필립이 가지고 있던 작센 선제후 자격을 빼앗아 갖는 것 등의 막대한 정치적 이익을 약속 받고 황제편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종교적 단일화를 통해 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꾀한 카를 황제의 목표는 전혀결국 다른이루어질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없었다.
프로테스탄트는 정치적으로 와해되었지만 마그데부르크와 북부의 몇몇 소제후들은 여전히 항쟁을 계속하였다. 1551년 작센의 모리츠는 카를 5세 편에 서서 루터파 도시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황제에게서 실망을 느끼고 있던 모리츠는 황제에게 등을 돌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와 팔츠 백 및 부르템베르크 공과 손을 잡고 황제를 공격하였다. 모리츠에게 붙잡히는 것을 모면한 황제는 오스트리아로 도망을 쳐야 했다. 1552년 8월 2일 파사우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종교적 문제에 대한 보다 진전된 해결은 3년 뒤인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의 제국 회의로 넘겨졌다.
카를 황제는 동생인 페르디난드에게 처리권을 넘겼다. 황제 측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종교 화의를 맺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가진 루터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인정되고, 군주가 받드는 종파(宗派)에 영민(領民)들은 복종해야 한다(Cujus regio, ejus religio)는 원칙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지배자의 종교에 따르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주의 자유와 적당한 시가에 따른 재산의 처분이 인정되었다. 제국의 자유도시에서는 양파의 공존이 인정되었다.<ref name="글로벌_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