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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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재학 시절 4학년 때인 1982년 [[위대한 탄생 (밴드)|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연주자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ref name=":7" /> 그를 만난 [[송홍섭]]은 "당시 대학생이었던 유재하는 내게는 굉장히 얌전한 학생이었고 성품도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팝 음악에 대한 욕망은 대단했다. 재하는 앞으로 팝 음악에 있어서 자기 깃발을 확실히 꽂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ref name=":6">{{웹 인용|url=http://music.naver.com/promotion/specialContent.nhn?articleId=3427|제목=유재하와 함께 했던 순간들|성=|이름=|날짜=|웹사이트=네이버 뮤직|출판사=|확인날짜=2017-02-05}}</ref> [[조용필]]은 훗날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자신의 7집 앨범에 먼저 취입했다. 이 2개월의 짧은 여정은 학교에서 대중음반 분야의 아르바이트는 허가할 수 없다는 사유의 방해로 중단되었다.<ref name=":7" /><ref name=":10">{{저널 인용|제목=사람은 갔어도 음악은 남아···|저널=1988년 음악세계 2월호|성=김|이름=정숙|url=|날짜=|출판사=}}</ref>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86년에 어릴 적 친구였던 김종진이 속해있던 김현식의 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에서 객원 멤버로 활동하였다. 대학 선배 한봉근은 "콘서트때나 녹음 때 한두번 세션으로 도와줬을 뿐이지 정식 멤버는 아니었다"고 말한다.<ref name=":8">{{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1&aid=0000048806|제목=다시 듣고싶다…그들의 노래를|성=이승형|이름=|날짜=2003-10-28|뉴스=문화일보|출판사=|확인날짜=2017-02-04}}</ref> 이 그룹에서는 6개월쯤 활동하였으며 대구, 부산 등지에서 [[신촌 블루스]] 팀과 함께 지방 공연을 갖기도 했다.<ref name=":10" /> 김현식에게는 자신의 1집에 수록될 전곡을 주었다.<ref name=":2">{{뉴스 인용|url=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1796594|제목=아! 故 유재하! 그가 없어 더욱 텅빈 오늘…11월 1일|성=이상훈|이름=|날짜=|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하지만 밴드 멤버와 추구했던 음악적 지향점이 달랐고,<ref name=":0" /> 후배 뮤지션을 편애하지 않고 챙겨주려 곡 하나만 가져간 김현식의 뜻을 오해하여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한 마음에 6개월의 밴드 활동을 접었다.<ref name=":2" /> 새로운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한 그는 데뷔 음반을 발표하기 위해 언더 음악의 산실 동아기획을 찾아갔다. 이 때 한양대 음대 선배로 기악과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했던 포크 가수 이원재와 함께 데모 데이프를 제출했다. 
 
이후에는 데뷔 음반을 발표하기 위해 언더 음악의 산실 [[동아기획]]을 찾아가 한양대 음대 선배로 기악과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했던 포크 가수 이원재와 함께 데모 테이프를 제출, 김영 사장은 고민 끝에 상업적 성공이 불안했던 유재하의 음악을 탈락시켰다고 알려져 있다.<ref name=":0" /> 하지만, 김영은 이를 부인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잘못된 소문이다. 이원재는 이원재대로 따로 음반을 냈다. 원래 유재하는 김현식의 3집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세션 멤버로 내가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집이 유복한 탓에 김현식 3집 녹음과는 별도로 자비를 털어 자신의 독집을 녹음한 것이다. ... 당연히 앨범 제작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조원익이라는 베이스 치는 친구가 음반 제작업을 하려는데 도와달라며 유재하의 앨범을 넘겨달라 했다. 유재하도 좀 도와주면 어떻겠냐기에 흔쾌히 수락했다."<ref name=":12">{{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131381|제목=김영 "최고 음악인은 김현식"|성=이창호|이름=|날짜=2005-11-18|뉴스=세계일보|출판사=|확인날짜=}}</ref>
 
{{quote box|align=left|width=25em|quote=86년 겨울, 재하가 레코드를 내겠다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준비해 온 악보를 내미는데 거기에는 작사, 작곡뿐 아니라 편곡까지도 완벽하게 되어 있더군요. 다른 사람의 손이 갈 여지가 없었습니다. 일사천리로 레코딩이 진행되었죠. 참 재능있는 친구구나 하며 기대를 크게 걸었습니다.<ref name=":10" />|출처=―조원익|halign=center|bgcolor=#FFFFF0|quoted=true}}
 
그룹을이렇게 나온 후 솔로 앨범을 위한 작업에 대한 구상을 마친 그는유재하는 1986년 겨울 베이시스트이자 후에 매니지먼트를 맞게되는베이시스트 조원익을 찾아가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였고,<ref name=":7" /> 1987년 8월 자신의 데뷔 앨범이자 유작 앨범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를 [[서울음반]]을 통해 발표한다. 음반이 나온 후 조원익은 유재하로부터 매니저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매니저로서의 자질이 없었다고 여겼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여 얼마 동안은 함께 일을 보러 다녔다. 이렇게 잠깐 매니저를 맡은 조원익은 그의 사후 처리 문제까지 맡았으며 결국에는 추모공연까지 기획하게 된다.<ref name=":10" />
 
《사랑하기 때문에》은 당초 '음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심의에서 반려가 되었으며, 발매 초기에도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다.<ref>[http://ruliweb.daum.net/news/view/MD20071108105710051.daum 故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여주인공은 '플루트 김'] 《마이데일리》, 2008년 11월 8일 작성</ref> 클래식 음악의 화성학과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터득한 유재하는 기존의 대중 가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를 만들었으며, 음악 관계자들조차도 '노래가 이상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8231010521&code=900313 유재하, 한국 ‘대중음악의 自主’ 를 이루다.] 《경향신문》, 2007년 8월 23일 작성</ref> [[문화방송|MBC]] 방송 심의를 위해 PD들 앞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거의 모든 노래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정박자가 아닌 엇박자로 시작되는데 PD들은 이를 듣고 그를 박자도 못맞추는 가수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f>{{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1&aid=0000048806|제목=다시 듣고싶다…그들의 노래를|성=|이름=|날짜=|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한국방송공사|KBS]]의 《[[젊음의 행진]]》에서 한 번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부른 게 유재하의 유일한 TV 출연이었다.<ref name=":6" /> 게다가 일본의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앨범의 수록곡 〈지난날〉은 예선에서 탈락, 그를 한층 더 낙담으로 몰아갔다.<ref name=":11">{{뉴스 인용|url=http://www.vop.co.kr/A00000089896.html|제목=생전의 불운, 사후의 영광|성=임진모|이름=|날짜=2007-10-30|뉴스=민중의소리|출판사=|확인날짜=}}</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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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11월 1일: 죽음 ===
음반 발표 후인 1987년 11월 1일 새벽 3시 27분 경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 부근에서 술에 취한 친구 성낙헌이 몰던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오던 한도콜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사고로 인해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f>휴지통 《동아일보》, 1988년 8월 3일</ref><ref name=":5">{{웹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80400289108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8-04&officeId=00028&pageNo=8&printNo=70&publishType=00010|제목="음주운전 교통사고 동승자도 50% 책임" "안전운행 주의 환기시킬 의무 지녀"|성=한겨레|이름=|날짜=1988-08-04|웹사이트=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출판사=한겨레|확인날짜=}}</ref> 그의 주검은 화장되지 않은 채 경기도 용인 천주교 용인 공원묘지에 묻혔다.<ref name=":4" /> 유재하 무덤 앞에는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의 악보 조각상이 있는데, 그 악보 중 2개 음표가 틀렸다.<ref name=":8" /> 친형은 그의 미발표곡은 남아있지 않으며, "동생이 대략 5년간 11곡을 썼다"고 밝혔다.<ref name=":4" /> 사망 후 일반인들과 음악 전문가들 사이에 유재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남과 동시에 유재하의 음악은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ref name=":3">{{웹 인용|url=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16365&bigcateidx=1&subcateidx=3&view_tp=1|제목=사랑하기 때문에|성=임진모|이름=|날짜=|웹사이트=이즘|출판사=|확인날짜=}}</ref> 3년 후 같은 날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자 연예계에는 "먼저 간 유재하가 술친구가 그리워 그를 데리고 갔다"는 호사가들의 이야기가 나돌았다. 여기에 더해 유독 11월에 연예계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지면서 '11월 괴담설'로까지 부풀려졌다.<ref name=":13">{{웹 인용|url=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88739&cid=58276&categoryId=58283|제목=가요앨범 리뷰 - 사랑하기 때문에|성=최규성|이름=|날짜=|웹사이트=네이버|출판사=한국대중가요연구소|확인날짜=}}</ref>
 
유재하의 가족은 운전자 성낙헌의 아버지 선순용과 한도콜택시 등을 상대로 4억 1,600여 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1988년 8월 3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5부에서는 "승용차를 모는 친구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같이 타고 가다 사고가 났으면 피해자도 50%의 과실이 있다"며 "피고 성씨는 유씨 가족에게 4,460여 만원을 지급하면 된다"고 판결했다.<ref name=":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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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ou_Hee-Yeol.jpg|섬네일|250x250픽셀|유재하의 영향을 받은 유희열. 그는 유재하 가요제를 계속하기 위해 기금 마련 공연을 열었다.<ref name="유희열" />]]
 
사후 유재하의 아버지 유일청은 아들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음반수익과 성금을 기탁하여 '유재하 음악장학회'를음악장학회를 설립하였다. 장학회 주관으로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으며,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 내기도 했다. 1회 대회 수상자인 [[조규찬]]을 필두로 [[유희열]], [[고찬용]], [[김연우]], [[나원주]], [[정지찬]] 등이 대표적이다.<ref name=":3" />

1990년대 발라드의 황제로 불린 [[신승훈]]은 자신의 데뷔 20주년 앨범을 유재하의 기일인 11월 1일 발매했다. 김동률은 "유재하의 죽음은 한국 발라드가 음악적으로 10년은 후퇴했음을 의미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ref name=":13" /> 유희열은 "유재하씨가 음대 작곡과 출신이란 걸 알고는 음대에 진학했어요. 거기 가면 그 정도 실력이 될까 하고요. 대학에 진학한 뒤 유재하 가요제에도 출전했죠."라고 말한고백하는 있다유재하는 후배 창작자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ref name="유희열">{{뉴스 인용|url=http://gangnam.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2310086&sc=&mc=|제목=[me] 유재하는 떠나보냈지만 가요제까지 보낼 수 없·어…|성=이경희|이름=|날짜=2006-05-31|뉴스=중앙일보|출판사=|확인날짜=}}</ref> 또한 작곡가 [[김형석 (음악가)|김형석]]이 음악에 발을 디딘 것도 그의 노래가 계기가 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8&aid=0000187516|제목=[스타메이커] 작곡가겸 음반제작자 김형석|성=|이름=|날짜=2003-06-18|뉴스=한국일보|출판사=|확인날짜=}}</ref> 이러한 후배 음악가들을 두고 사람들은 유재하사단이라고 일컫는다.<ref name=":11" />
 
유재하 음악의 가치는 영화와 각종 TV 프로그램, 언론 기사에서 지금도 확장되고 있다.<ref name=":13" /> 유재하의 노래는 1985년 조용필을 필두로 [[이문세]], [[한영애]],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FT아일랜드]], [[박진영]], [[DJ DOC]], 조규찬, [[왁스 (가수)|왁스]], [[이기찬 (가수)|이기찬]], [[정수라]], [[나얼]], [[백지영]], [[김조한]], [[박정현]] 등 수많은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에픽하이]]는 [[High Society|2집 앨범]]에서 〈11월 1일〉이란 곡으로 김현식과 유재하를 추모했다.<ref>{{웹 인용|url=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8231025551&code=900313|제목=대중음악 100대 명반 ‘들국화’1위|저자=경향신문|날짜=2007/08/23}}</ref> 1996년 저명한 클래식 연주자 [[리처드 스톨츠만]]은 자신의 음반 《Spirits》에 〈사랑하기 때문에〉를 수록했다.<ref>{{뉴스 인용|url=http://gangnam.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3284933&sc=&mc=|제목=유재하 유작 "사랑하기 때문에" 클라리넷으로 연주|성=|이름=|날짜=1996-06-16|뉴스=중앙일보|출판사=|확인날짜=}}</ref> 한국에서 발매된 음반에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부제로 찍혀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52300209129008&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05-23&officeId=00020&pageNo=29&printNo=23203&publishType=00010|제목=리처드 스톨츠먼의「Spirits」|성=|이름=|날짜=1996-05-23|뉴스=동아일보|출판사=|확인날짜=}}</ref> 1997년에는 후배 음악가들이 헌정 앨범인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를 발표하였다. 유재하의 유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경향신문]]에서 [[2007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목록]]"에서 2위를 차지했다. 앨범 발표 당시 크게 히트하지 않았던 〈우울한 편지〉는 2003년 [[대한민국 영화|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범행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로 영화에 삽입되어 다시 히트하기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eekly.hankooki.com/lpage/culture/200712/wk2007120611301937140.htm|제목=[우리시대의 명반·명곡] 류재하 1집 '사랑하기 때문에'/ 1987년 서울음반|이름=|날짜=2007-12-06|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저자=주간한국}}</ref><ref>{{웹 인용|url=http://www.gqkorea.co.kr/2014/10/31/1-%EC%9B%83%EB%8A%94-%EB%AA%A8%EC%8A%B5%EC%9C%BC%EB%A1%9C-%EA%B0%84%EC%A7%81%ED%95%98%EA%B3%A0-%EC%8B%B6%EC%9D%80-%EC%9C%A0%EC%9E%AC%ED%95%98/|제목=#1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은 유재하|성=유|이름=지성|날짜=2014-11-01|웹사이트=GQ|출판사=|확인날짜=}}</ref> 유재하의 유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경향신문]]에서 2007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목록]]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17년 1월 4일에는 그의 1집 제목을 딴 영화 《[[사랑하기 때문에 (영화)|사랑하기 때문에]]》가 개봉했다. 차태현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 영화는 느낌이 괜찮았는데 저는 좀 걸렸"지만, "이 작품을 선택한 건 유재하 노래로 채워진다는 게 좋아서였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11&newsid=01413686615793784&DCD=A10302|제목=차태현, '사랑하기 때문에'는 '유재하 때문에'|성=|이름=|날짜=2017-01-02|뉴스=이데일리|출판사=|확인날짜=}}</ref><ref>{{뉴스 인용|url=http://www.sportsseoul.com/news/read/471376|제목='정희' 차태현 "'사랑하기 때문에' 출연, 故 유재하 노래 영향 커"|성=|이름=|날짜=2017-01-03|뉴스=뉴미디어국|출판사=|확인날짜=}}</ref> 주지홍 감독은 "나는 시나리오 각색에 참여하다 연출까지 하게 됐다. 평소 유재하의 노래를 좋아한다. 유재하 노래의 가사를 영화를 통해 소개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 유재하의 노래를 통해, 우리 영화를 같은 느낌으로 끌어가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munh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302|제목='사랑하기 때문에' 주지홍 감독 "유재하 노래 이야기를 선보인 이유는?"|성=양미르|이름=|날짜=2016-12-20|뉴스=문화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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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는 애주가였다. 바로 위의 친형은 "선친이 약주를 좋아하셨는데 집안 내력인지 제가 동생에게 '술을 366일 먹느냐'고 잔소리를 하곤 했죠. 재하는 싸고 독한 40도짜리 쥬니버 드라이진을 좋아했어요. 전 한잔도 못 하겠던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1시간 반이면 700㎜짜리 한 병을 다 비웠죠. 그것도 '스트레이트'로요."라고 회고하였다.<ref name=":4" /> 김광민 또한 "유재하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다. 술 마시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서 돈을 가져와 더 마실 정도였다"고 말했다.<ref name=":9">{{뉴스 인용|url=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622816|제목='라스' 김광민 부유했던 유재하 언급 '집안 집기 다 외제품'|성=|이름=|날짜=2014-10-30|뉴스=일간스포츠|출판사=|확인날짜=}}</ref>
 
장기호는 "아버님이 탄광을 하신 것으로 안다. 재하의 외모는 중산층 아래쪽 이미지인데 집을 가보면 굉장히 부유했다"며 "약간 빈티지다. 재하 집에 있던 모든 집기는 외제품이였다."라고 당시 부유했던 유재하의 집안을 회상했다.<ref name=":9" /> 동아기획의 대표 김영은 유재하가 "요즘말로 하면 개그맨"이었으며 "또 미남은 아니었지만 바람둥이였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urlname=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131381|제목=김영 12"최고 음악인은 김현식"|성=이창호|이름=|날짜=2005-11-18|뉴스=세계일보|출판사=|확인날짜=}}</ref>
 
== 음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