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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복종==
로마와 강화를 맺은 [[나비스]]는 [[기원전 192년]]에 아카이아와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아이톨리아에 원군을 요청했다. 아이톨리아는 알렉사메누스의 지휘 하에 1000기의 기병을 파병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병력은 나비스를 살해하고, 스파르타를 잠정적으로 점령했다. 아이톨리아 병력은 궁을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했다. 그러나 스파르타 시민들의 저항으로 퇴각을 했다.
 
필로포이멘은 이 틈을 이용하여 군대를 이끌고 스파르타를 기습하여 스파르타를 아카이아 동맹에 가입시켰다.
 
스파르타의 동맹 가입은 얘기치 않은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다년간 스파르타를 지배해 왔던 사회 혁명 정권에 의해 추방된 모든 스파르타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한 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필로포이멘은 동맹 가입을 지지하는 스파르타인들만 복귀시키길 원했다. 이것은 전통적 스파르타인의 관심사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적대관계를 채택한 것을 의미했다.
 
[[기원전 191년]], 필로포이멘의 차기 [[스트라테고스]]인 디오파네스가 반란의 기미가 있다고 스파르타를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필로포이멘은 로마와 슈리아가 그리스에서 창을 맞대고 있을 때 섣부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디오화네스는 충고를 듣지 않고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함께 스파르타를 침공했다. 자신의 의견을 무시한 것에 성난 필로포이멘은 단신으로 스파르타에 가서, 디오파네스와 플라미니누스에 대항하여 스파르타의 성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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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물리친 로마의 권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필로포이멘은 아카이아 동맹이 로마를 대적할 수 있다고 끝까지 믿었다. 그가 추방한 스파르타 인의 귀국을 로마가 막자 이번에는 로마에 적대했다.<ref>플루타르코스, “필로포이멘” 17 </ref>
 
[[기원전 183년]], 필로포이멘이 나이 70에 도달했을 무렵, 디노크라테스의 주도로 메세네에서 반 아카이아 동맹의 반란이 일어났다. 디노크라테스는 코로니스라는 마을을 공격하려고 했다. [[아르고스]]에 반란 소식을 접한 필로포이멘은 하루 만에 메갈로폴리스로 급히 가서 기병 부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그는 에우안도로스라는 언덕 근처에서 디노노크라테스와 전투를 벌여 패주를 시켰지만 새로운 적 방력 500명이 왔다. 따라서 포위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필로포이멘은 철수했지만, 낙마하여 메세니아 인들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다.<ref> ibid 18 </ref>
 
투옥된 필로포이멘은 독을 마시도록 강요받았다. 당시 이것은 명예로운 죽음의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부하 장군인 [[리코르타스]]의 안부를 묻고, 그가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는 "당신은 좋은 소식을 알려 주었다. 우리는 전혀 불행하지 않은 것 같다"라는 말을 남기고 독을 마셨다.<ref>ibid, 20</ref>
 
필리포이멘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아카이아 동맹은 보복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리코르타스의 지휘 아래 메세니아를 공격했으며, 디노크라테스는 자살했다.
 
필로포이멘은 화장되어 그 유골은 메갈로폴리스까지 마치 승리한 개선자처럼 옮겨졌으며, 리코르타스의 아들로 나중에 역사가가 되어 필로포이멘의 활약을 후세에 남겼던 [[폴리비오스]]가 그 곁을 지켰다.<ref>ibid, 21</ref>
 
==주석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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