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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tale of Gumseong Daegun.jpg|thumb|[[금성단]] 안에 있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그 후 9월에 [[금성대군]]은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여 영남 인사에게 격문(檄文)을 돌려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밀고가 들어가 탄로 나서 금성대군은 안동에 하옥되고, 이보흠과 기타 영남의 인사들도 많이 주살(誅殺)되었다. 한편, 세종의 아들 [[한남군]](漢南君)·[[영풍군 (왕족)|영풍군]](永豊君) 등도 멀리 귀양 가고 노산군에 대하여는 군(君)을 폐하여 서인으로 하였다. 이에 영의정 정인지·좌의정 [[정창손]]·이조판서 [[한명회]]·좌찬성 [[신숙주]] 등은 계속 노산군(단종)과 금성대군을 치죄할 것을 주장하여, 세조는 마침내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하고 불과 이때 나이 17세였던 단종 역시 사사하였다.
* 단종(端宗, 1441년 8월 9일 (음력 7월 23일) ~ 1457년 11월 7일 (음력 10월 21일), 재위 1452년~1455년);
 
== 영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