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모수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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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38년경에 멸망했다는 것은 환단고기에나 나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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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모수]]는 천제(天帝)의 아들 또는 천제 본인으로, [[기원전 59년]]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졸본]] 인근에서 나라를 세웠다. 천제 [[해모수]]가 세운 나라가 [[북부여]]라고 하며, 수도는 흘승골성(訖升骨城)이다. [[해모수]]가 낳은 아들이 [[해부루]]이며, [[해부루]]가 [[동부여]](가섭원)로 옮긴 뒤 남은 땅에서 동명성제(東明聖帝)가 일어나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다.<ref> [[#일연 (1281)|일연 (1281)]] 북부여조, “古記云。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降于訖升骨城{{할주|在大遼醫州界}}乘五龍車。立都稱王。國號北扶餘。自稱名解慕漱。生子名扶婁。以解為氏焉。王後因上帝之命。移都于東扶餘。東明帝繼北扶餘而興。立都于卒本州。為卒本扶餘。即高句麗之始祖。”(《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전한 선제 신작 3년 임술년(기원전 59년)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할주|대요 의주 경계에 있다}}에 오룡거를 타고 내려왔다. 그 곳에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解)를 성(姓)으로 삼았다. 왕(해부루)은 후에 상제의 명령으로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이어받아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를 이룩하니,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ref> 그런데 이러한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달리, 중국 측 사서에 따르면 [[부여]]는 이미 [[춘추 전국 시대]](기원전 770~기원전 221)부터 등장하고 있으므로, [[해모수]]에 의한 기원전 59년 건국설은 문제가 있다.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 나이가 22세였으므로, 기원전 59년은 [[주몽]]이 태어난 해이다.<ref> [[윤내현]], 〈부여의 분열과 변천〉. (《상명사학》 3 ·조경래박사정년퇴임기념논문집, 1995), 459쪽. </ref> 즉, 《[[삼국유사]]》에서 [[북부여]]가 기원전 59년에 건국되었다고 한 것은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 설화와 [[부여]] 건국 설화를 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부여]]의 건국 시기는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로 보아야 한다. [[단군조선]]이 기원전 238년경에 멸망하면서 72국으로 흩어져 살았다는 《[[삼국유사]]》의 문헌 내용, 조선의 유민이 70여 국으로 나뉜다는 기록과,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서한(西漢)은 조선의 옛 지역에 처음에는 4군을 두었다가 뒤에는 2부를 두었는데, 법령이 점차 번거로워지면서 갈라져 78국으로 나뉘고 각각 1만 호씩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에서 각기 다른 이름(탁리국(橐離國), 고리국(高離國), 색리국(索離国), 탁근국(卓斤國) 등)으로 문헌에 남겨졌다고 추정하고 있다.<ref> 나하나,〈부여의 변천과 동부여 문제〉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 제23집, 2009.12. 309쪽. </ref>
 
《삼국유사》와 달리, 《[[삼국사기]]》 및 [[동명왕편]]에 따르면, 천제의 아들 [[해모수]]는, [[해부루]]가 하늘의 계시를 받아 나라를 동쪽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기고 난 뒤에 남은 땅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ref>[[#김부식 (1145)|김부식 (1145)]]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아란불이 왕에게 권하니 도읍을 이곳으로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그곳의 옛 도읍에도 사람이 있어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모르나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는 이가 와서 도읍한 적이 있었다.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