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공방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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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의 공격 ==
=== 준비 ===
후에 [[독일민주공화국]]이 된 중부 독일을 공격한 소련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 전후 소련 세력 하에 들어올 지역을 서부 연합군이 손 댈리 없다고 판단한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은 가능한 빠른 속도로 더 넓은 지역을 손에 넣은 상황에서 서부 연합군 측과 조우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우선 목표는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을 확보하지 않고는 주변 지역을 효율적으로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히틀러의 신변과 [[원자 폭탄]] 개발 계획 확보는 물론이거니와 베를린 자체가 전후 중요한 전략 거점이었다는 점이다.

1945년 [[4월 9일]], [[동프로이센]]에 있는 [[쾨니히스베르크]]가 마침내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로 인해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의 제2 벨라루스 전선군은 오데르 강 동안에서 서안으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4월 첫째 주와 둘째 주 동안 소련군은 대전 중 가장 빠른 전선 구축 능력을 보여주었다.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발틱 지역 남쪽에 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오데르 강을 따라 배치된 자신의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을 베를린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젤로]] 전면에 집중시켰다. 제2 벨라루스 전선군으로부터 전선을 인계받은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은 [[젤로 고지]] 북쪽에 포진했다.

이렇게 재배치가 이루어지던 중 전선에 구멍이 생겼고, 이를 틈타 단치히 근방에서 형성된 포위망에 빠져있던 [[독일 제2군]] 잔존 병력들이 오데르 강을 건너 탈출했다. 남쪽에서는 [[이반 코네프]] 원수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주력 부대가 [[상 슐레지엔]] 북서 지역에서 [[나이세 강]]으로 위치를 옮겼다. 세 전선군의 병력은 총 250만명에 달했으며(78,566명으로 구성된 폴란드 제1 군을 포함해), 전차 6,250량, 항공기 7,500대, 박격포 및 야포 41,600문, 스탈린의 오르간이라는 별명이 붙은 3,255문의 카츄사 다연장 로켓포 그리고 대부분 미군에게 공여받은 95,383량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3월 20일]] 비스툴라 집단군 사령관이 하인리히 힘러 SS제국지도자에서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상급대장으로 교체되었다. 독일군 내에서 내선 전문가로 정평이 난 하인리치는 즉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련 주력 부대가 오데르 강을 도하해 동서를 가로지르는 간선 [[아우토반]]을 따라 진격해 올 것을 정확히 예측했다. 그는 엷은 전초 방위선을 제외하곤 어떠한 수비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오데르 강 기슭을 비워두기로 결정했다. 대신 아우토반이 관통하고 있는 오데르 강 일대를 굽어 볼 수 있는 지점인 젤로 고지에 공병을 포함한 독일에 마지막으로 남은 정예 병력들 11만 2143명을 동원해 강력한 방위선을 구축했다. 오데르 강 및 베를린에서 동쪽으로 각각 17km 그리고 90km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는 고지 수비선을 보강하기 위해 여타 수비선이 약화되는 것을 개의치 않고 다른 곳에서 병력을 차출했다. 독일 공병들은 해빙으로 인해 물이 불대로 불은 저수지를 방류해 오데르 강 일대를 늪지대로 만들었다. 베를린 외곽과 맞닿는 후방 지역에는 세 겹으로 된 방위선을 구축했다. 이 방위선은 대전차호, 대전차 진지 그리고 거미줄처럼 광범위하게 연결된 참호와 벙커로 구성되었다.
 
=== [[오데르-나이세 전투]], [[젤로 고지 전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