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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시강원 활동 ====
[[1657년]](효종 8년) [[8월 18일]] 통정대부 [[세자시강원]]찬선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번 직책이 개정되면서도 [[세자시강원]]찬선을 겸임하여 59년 [[6월]]까지 세자인 [[조선 현종|현종]]의 사부로서 가르쳤다.
 
[[1658년]](효종 9) 대사헌, 그해 [[4월 13일]] 가선대부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5월 25일]] 행용양위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7월 27일]] 행[[세자시강원]]찬선, [[9월 18일]] [[사헌부]][[대사헌]]으로 찬선을 겸하였다. [[10월 9일]] [[이조]][[참판]]겸 [[세자시강원]]찬선, [[11월 3일]] [[세자시강원]]찬선, [[12월 1일]] [[성균관]]제주 겸 세자시강원찬선, [[12월 10일]] [[사헌부]][[대사헌]]겸 [[성균관]]제주 세자시강원찬선, 13일 다시 대사헌 겸 제주, 찬선, 16일 찬선 겸 제주, [[12월 20일]] [[사헌부]][[대사헌]]겸 [[성균관]]제주 세자시강원찬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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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ong si-yeol 76.jpg|thumb|right|180px|친척이자 친구인 [[송시열]]]]
{{참고|예송}}
그 뒤 [[자헌대부]]로 승진 발탁되어 [[사헌부]][[대사헌]]겸 [[성균관]]제주가 된 뒤 이조판서로 있던 [[송시열]]과 함께 조정의 공론을 장악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쳐 [[1659년]](효종 10년) [[병조판서]]로 특별 발탁되었다. 이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조선 현종|현종]]이 즉위, 효종상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이른바 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만 1년)를 주장할 때, [[김수항]], [[원두표]] 등과 함께 송시열의 참최복 설을 지지하여 [[남인]](南人)의 [[윤휴]](尹鑴)·[[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단 참최복을 관철시켰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ref name="park031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18</ref>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원칙대로 당연히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park0318"/>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ref name="park0318"/> 서인과 남인의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ref name="park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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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와 최후 ===
[[1663년]] 행 [[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고, 그해 [[9월]] [[송시열]]을 변호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1665년([[조선 현종|현종]] 66년)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원자]]보양관이 되었으나 2차 예송논쟁으로 사퇴하였다. 이후 김집, 송시열, 윤선거 등과 강독하고 토론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송준길은 [[윤선거]]의 사람됨을 아깝게 여겨 그를 계속 관직에 추천했으나, [[윤선거]]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또 [[윤선거]]와 [[송시열]]의 사이를 화해시키려 여러번 노력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윤선거]]는 죽기 직전까지도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을 결코 꺾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의 아들에게 내려진 벼슬까지 거두어줄 것을 간청했다.<ref name="balchik0207">정구선,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비전비앤피 애플북스, 2009) 207페이지</ref> [[1669년]](현종 10년) [[4월]] [[윤선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현종|현종]]은 "윤선거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슬픈 일이다"라고 애석해했다. 또한 [[참찬]] [[송준길]]은 "사우(스승과 동료)간에 윤선거를 엄탄지신(嚴憚之臣)이 될만 하다고 했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으니, 정말 국가의 불행입니다."하고 탄식했다.<ref name="balchik0207"/> [[윤선거]] 사후 그에게는 [[이조]][[참의]]가 [[추증]]되었다.<ref name="balchik0207"/> 그에 대한 추증은 당시 [[의정부]][[좌참찬]] 송준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는데, 송준길이 아뢴 바를 보면 "윤선거는 국가에서 예우하던 신하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 사우들이 모두 애석해합니다. 윤선거가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여 소장(梳章)에까지 한번도 직함을 쓰지 않은 것은 성상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사후 명정(銘旌)에도 '성균 생원'이라 썼다 하니, 그 예우하는 도리로 [[증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했다.<ref name="balchik0207"/>
 
[[1670년]] 세자의 관례식에 참석한 뒤 낙향하였으며, 이후 회덕 향리에 은거하다가 [[1672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어록해 語錄解》·《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 등이 있다. 사망 당시 그의 향년 6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