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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운대와 문학 ==
* [[통일 신라]]의 시인 [[최치원]]은 가야산으로 가던 도중 동백섬에 들러 일대의 경치에 반하여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을 붙여 동백섬의 한 절벽을 해운대라고 이름 붙였다. [[백제]]의 [[동맹국]]으로써 [[왜]]에 상당히 적대적인 [[신라]]의 호국 정신에서 순우리말 표현으로 간주하고 해석하면 "[[태양|해]] 운데([[일본]]이 엉엉 울고 있데)"가 가능하다. 이후 의미가 확장돼 현재 협의로는 '해운대 해수욕장', 광의로는 '해운대구'의 뜻으로 쓰인다. 동백섬 언덕 마루에는 최치원의 동상과 그의 시비가 있다. 최치원은 후대에 해운대를 찾은 문인들의 작품에서 방랑객, 신선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게 된다. 참고로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벼슬 생활을 하면서 [[토황소격문]]을 쓴 곳이 양저우 시였다. 최치원이라는 공통 인물을 매개로 해운대구와 [[양저우 시]] 유양구는 [[2006년]] ~ [[2007년]]에 걸쳐 방문단을 교환하였고 자매결연을 맺었다.
 
* 조선통신사 정사 [[윤순지]]([[1591년]] ~ [[1666년]])는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해운대를 찾아 <내산만점(萊山謾占)>이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에서 시인은 최치원을 유학자 신선이라는 뜻으로 최유선이라고 하였고, 해운대를 인간 세상의 가장 기이한 곳이라고 노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