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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 지식인([[낭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아들 [[대한제국 순종|황태자 척]]과 함께 일본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에 의해 [[창덕궁]] 또는 [[덕수궁]]에 감금당해 있었다.
 
일본은 1895년 낭인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 뒤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ref name="명성황후">《명성황후와 대한제국》, 39~63쪽.</ref>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ref>《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66~67쪽</ref> 이것이 국민 감정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유길준]]과 개화파, 한국 군벌 등이 일본인 낭인들의 길안내를 담당했고, 궁녀로 변장한 명성황후를 찾아내는데 협력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친대원군계 세력도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했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 (대한제국)|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의 시체를 소각하는걸 도와줬다. 사건 이후 명성황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인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뒤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기도 했다. 구연수는 [[한일 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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