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원정: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150번째 줄:
[[1854년]] [[2월 13일]], 페리는 류큐를 통해 다시 우라가에 내항했다. 막부와 1년간의 유예 기간을 준다고 타협하고서 굳이 반년 만에 결단을 강요하자, 막부는 매우 초조해졌다. 페리는 홍콩에서 막부 이에요시의 죽음을 알고 국정 혼란의 틈타보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페리의 외교 수완을 간파할 수 있다.
 
[[1864년1854년]] [[2월 11일]]에 수송함 ‘사우스햄턴’(범선)이 나타났고, [[2월 13일]]에는 ‘서스퀘해나’, ‘미시시피’, ‘포우하탄’(이상, 증기외륜 프리깃), ‘마케도니안’, ‘밴달리아’(이상 범주 슬루프), ‘렉싱턴’(범주 보급함) 6척이 도착했다. 이들은 [[에도 만]] 도착 후 기함을 ‘포우하탄’으로 옮겼다. [[3월 4일]]에 ‘새러토가’(범주 슬루프), [[3월 19일]]에 ‘서플라이’(범주 보급함)가 도착해 모두 9척으로 당시로서는 대규모 함대가 에도 만에 집결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도 우라가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 관광지가 되어 있었고, 제멋대로 배를 내어 미국인과 접촉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요시다 쇼인]]이 외국 유학을 위해 밀항을 기도하여, 포우하탄 호에 접촉한 것은 [[1854년]] [[4월 25일]]로 시모다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막부는 예정되지 않은 갑작스런 대규모 함대의 출현에 놀랐지만, 이전의 내항 때처럼 일본 측이 미국 측을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고, 미국 측은 선상에서 일본 측의 사신에게 [[프랑스 요리]]를 대접하며 환영했다. 일본인이 [[도미]]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듣고, 미국 측은 도미를 낚아 요리에 사용하는 등 일본 측을 의식한 부분이 요리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