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 스톤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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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
1950년대 초 키스 리처즈와 믹 재거는 소꿉 친구였으며 서로의 가족이 이사하기 전까지 다트포드 웬트워스 초등학교에서 급우였다.<ref>{{
이언은 연습 장소를 찾아 브라이언과 함께 가입하고 밴드는 시카고 블루스를 연주하기 시작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isafoc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5356|제목=롤링스톤즈, "트럼프에 우리 노래 쓰게 허락한 적 없어"|성=강민욱|이름=|날짜=2016-5-5|뉴스=시사포커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름도 결정하지 않은 밴드는 재거의 강요로 합류한 리처즈와 함께 첫 리허설을 한다. 리허설에는 기타리스트 [[제프 브래드퍼드]]와 보컬리스트 [[브라이언 나이트]]도 참가했지만 두 사람은 믹과 키스가 좋아하는 척 베리, 보 디들리의 곡을 연주하는 것에 반발하여 밴드 가입을 거부했다.{{sfn|Jagger|Richards|Watts|Wood|2003|p=40}} 1962년 6월의 라인업은 재거, 브라이언, 리처즈, 스튜어트, 테일러, 그리고 드러머 토니 채프먼였다. 키스의 말에 의하면, 브라이언이 《재즈 뉴스》에 전화를 거는 사이에 밴드 이름을 결정했다고 한다. 밴드의 이름을 물었을 때, 브라이언은 바닥에 있던 머디 워터스의 음반을 보고, 그 중 한 곡인 〈[[Rollin' Stone]]〉을 밴드명으로 정한다.<ref name="accordingto2003p42">Jagger, Richards, Watts, Wood 2003. p. 42</ref><ref name="AMG">{{
=== 1962-1964 ===
1962년 7월 12일 밴드 이름을 그대로 더 롤린 스톤스(The Rollin' Stones)로 하여 [[마키 클럽]]에서 〈Kansas City〉, 〈Bad Boy〉 등 18곡을 선보이며 첫 공연을 가졌다.<ref name="rollingwithp36-37">{{
1963년 4월 [[앤드류 루그 올덤]]이 그룹의 매니저가 되었고, 그해 5월 이언 스튜어트가 팀에서 탈퇴했다. 1963년 6월, 그룹은 미국의 로큰롤 뮤지션 [[척 베리]]의 곡을 리메이크한 데뷔 싱글 〈Come On〉을 발표했다. 데뷔 당시 [[비틀즈]] 흉내를 내다가 참패를 맛본 그들은 매니저 앤드류 루그 올덤의 권고에 따라 곧바로 정반대 이미지로 차별화하여 재도전을 단행했다. 이때부터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는 불량, 퇴폐, 반항, 비행, 섹스 그리고 말썽과 같은 [[하위문화]]가 되었다.<ref name=":2" />
[[
1964년 2월 7일, [[비틀즈]]의 주도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되었고, 6월에 롤링 스톤스도 편승했다. 1964년 영국에서는 《[[The Rolling Stones (음반)|The Rolling Stones]]》, 미국에서는 《England's Newest Hit Makers》라는 제목으로 데뷔 음반을 발표했다. 롤링 스톤스는 비틀즈처럼 미국에서 히트한 곡 없이 무작정 미국으로 진출하여 무모하게도 보인 미국 진출이었지만, 2집에 수록된 〈[[Time Is On My Side]]〉가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면서 주목을 받게 되고, 1965년 공개된 앨범 《[[Out Of Our Heads]]》에 수록된 〈[[(I Can't Get No) Satisfaction|(I Can’t Get No) Satisfaction]]〉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ref name=":3">{{뉴스 인용|url=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1379&yy=2012|제목=[뮤직 토크] 롤링스톤즈(상)|성=권오성|이름=|날짜=2012-11-15|뉴스=|출판사=매일신문사|확인날짜=}}</ref>[[파일:Brian_Jones_1965.jpg|섬네일|250x250px|1965년의 브라이언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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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2월 6일, 롤링 스톤스가 캘리포니아 주 앨터몬트 고속도로에서 무료로 연 공연을 보기 위해 3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아수라장이 되었고, 흥분한 관중 가운데 흑인 청년이 경호팀 헬스엔젤스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후에 흑인 청년이 총기를 사용하려 했다는 증거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 추방을 당했다.<ref name=":1" /> '알타몬트의 비극'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사랑과 평화'로 대변되는 히피 시대의 막을 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ref name=":4" /> 이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밴드는 사건 당시에 연주하고 있던 〈Sympathy For The Devil〉을 무대에서 한동안 연주하지 않았다.<ref name=":0" />
1970년 자신들의 레이블 [[롤링 스톤스 레코드]]를 설립한 후,<ref>{{웹 인용|url=http://www.groovers.kr/mqs/artist/LOT6JEc|제목=Rolling Stones|성=김경진|이름=|날짜=|웹사이트=그루버스|출판사=|확인날짜=}}</ref> 잠시 휴식기를 보낸 밴드는 1971년, 평단으로부터 "밴드 최고의 앨범"이라는 찬사를 받은 《Sticky Fingers》를 직접 설립한 레이블에서 발표했다. 1972년에 발표한 《Exile On Main St.》는 18곡을 수록한 더블 앨범으로 음악적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1973–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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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믹 테일러의 탈퇴 후, 영국 록 그룹 [[페이시스]] 출신의 기타 연주자 [[로니 우드]]를 영입했다.<ref name=":4" />
1978년에 발표한 《Some Girls》는 디스코 영향권에서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낸 걸작으로 〈Miss You〉, 〈Beast Of Burden〉이 히트했다. 미국에서만 600만 장 이상 판매된 앨범은 영국에서도 골드를 기록하며 최고 히트작이 되었다. 1980년에 발표한 《Emotional Rescue》는 로큰롤 성향이 짙어진 앨범으로 영국, 미국 차트 1위에 올랐다.
1985년 믹 재거가 솔로 데뷔앨범 《She's The Boss》를 발표하면서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그리고 1986년 믹 재거가 팀의 스튜디오 앨범 《Dirty Work》의 홍보 투어를 거부하고 솔로 활동에 매진하면서 1980년대 후반까지 팀 내분이 최고조에 달했다.<ref name=":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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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발매되어 85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들 목록에 오른 [[마룬 5]]의 〈[[Moves Like Jagger]]〉의 Jagger는 롤링 스톤스의 보컬 [[믹 재거]]를 뜻한다.<ref name=":3" /> 롤링 스톤스와 마룬 5는 예전에 함께 투어를 한 적이 있다.
;[[비틀즈]]
1960년대까지 롤링 스톤스는 비틀즈를 의식한 활동을 했다. 예를 들어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레논-매카트니|공동 작곡 시스템]]을 갖추자 믹 재거와 키스 리처드도 이를 흉내내어 [[재거/리처즈]]란 시스템을 구축했다.<ref name=":1" /> 1966년작 《Aftermath》는 재거와 리차즈가 《[[Rubber Soul|Rubber soul]]》에 충격 받고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자세로 제작에 임한 것이며, 1967년 사이키델릭 음반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황급히 만들어진 것이었다.<ref name=":2" />
== 바깥 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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