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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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동래]]에 상륙한 지 20일 만에 서울에 당도할 정도로 파죽지세로 진격하였고, 인천과 안산 금천 등지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인천의 지역민들은 [[문학산성]]에서 분투하여 일본의 진격을 저지하였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조우성|2004년|pages=18-19}}</ref>
 
[[조선 효종|효종]]은 인천 일대에 월곶, 제물, 용진, 초지, 인화석, 승천, 광성 등의 진보를 설치하였고<ref>[http://m.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14235&bbsId=BBSMSTR_1008&mc=MS_05_02 강화도는 땀과 눈물로 억척스럽게 일구어낸 간척섬이다], 문화재청</ref>, [[병자호란]] 때 [[강화도]] 길이 막혀 낭패를 보았던 일<ref group="주해">병자호란 당시 서울에서 강화도를 가는 길은 양화나루를 넘어 김포, 통진을 거쳐 [[문수산성]] 앞에서 강화도 갑곶으로 [[염하]]를 건너는 것이었다. - {{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2013년|page=161}} <br />
인조는 남한산성을 떠나 강화도로 가고자 하였으나 청군이 이미 한강을 넘어 봉은사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단념한다. 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 2》, 푸른역사, 2013년, ISBN 9791156120026, 96-97쪽</ref> 을 방지하기 위해 제물포에서 영종도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가는 우회로를 확보하였다. 이때부터 제물진은 조선의 주요 군사요충지가 되었다.<ref name="나채훈박한섭34-35" />
 
[[조선 숙종|숙종]] 시기에 월미도에 행궁을 만들고 해안 방어를 강화하였다.<ref name="숙종실록34" /> 숙종대의 해방론(海防論)은 [[황당선]](荒唐船)과 관계가 있다. 황당선은 다른 나라 배, 특히 문자그대로 중국의 배를 일겉는 말이었는데, 이들은 고기잡이를 목적으로 조선 연안에 자주 출몰하였다. 이들은 고기잡이 뿐만 아니라 밀무역도 하였다.해금(海禁)과 함께 사무역을 금지하였던 조선은 이들을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숙종 36년 청나라가 해적을 경계하라고 알려옴에 따라 산둥지역 해적을 방비할 필요가 제기되었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윤대영|20110년|pages=23-2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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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ttle of Inchon.png|thumb|인천상륙작전 후 미군이 상륙정을 정박하여 상륙하는 모습.]]
 
1950년 6월 15일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ref name="한국사특강302303">한국사특강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년, ISBN 89-7096-115-1, 302-303쪽</ref> 전쟁을 일으킨지 3일만에 [[서울]]을 함락한 [[조선인민군]]은 7월 4일 인천을 점령하였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page=222}}</ref> 인민군의 진격이 임박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인천지역 [[보도연맹|보도연맹원]]을 모아 학살하였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기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9일 인천에서 한국경찰이 400여 명 이상의 주민을 학살하였다”고 미 8군이 극동사령부에 보고하였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이회한|2008년|page=216}}</ref> 한편, 인천을 점령한 인민군은 군경 및 우익단체 15명을 학살하였고<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이회한|2008년|page=219}}</ref>, 100여명의 우익인사를 인천경찰서 유치장에 구속하였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2003년|page=223}}</ref>
 
미군과 한국군은 전세 역전을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ref name="한국사특강302303" /> 상륙에 앞서 미군은 6월에서 8월사이 인천의 곳곳을 폭격하였다. 이 폭격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이회한|2008년|pages=219-220}}</ref> 특히 폭격과 함포사격이 집중된 곳은 [[월미도]]로 상륙지점을 위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시행된 위장 포격과 네이팜탄 폭격으로 월미도는 초토화되었고 그곳에 살던 80여 가구의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죽었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이회한|2008년|page=244}}</ref> 1950년 9월 15일 2차례에 걸친 상륙작전이 실시되었고 이튿날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였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2003년|page=226}}</ref>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전쟁의 전세는 역전되어 인민군은 북으로 후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