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 (147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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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은 그에게 '중전(문정왕후)이 동궁(東宮, 인종)을 매우 박대하니 놀라운 생각을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언적의 이 말은 이기 외에는 들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기가 곧 [[윤원로]]를 찾아가 누설하였으므로 [[윤원로]]는 [[이언적]]을 원망하여 드디어 소원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다시 소문이 났고, 이기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한편 [[윤원로]]는 이기를 덕스럽게 여겨 '이기는 [[이학]](理學)에 정통한데 [[중국]]에서 찾아보아도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그 뒤 [[문정왕후]]와 [[윤원형]], [[윤원로]]의 후원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 그해 [[3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가 [[3월 9일]] 행[[형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10일만인 [[3월 19일]]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한편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싸움에 참여하기 싫었던 그는 병을 핑계로 경연 등을 회피하였다. [[조선 명종|명종]]실록에는 '매양 몸이 불편하다고 핑계하고 다른 곳으로 나가 누워 있으면서 참석하여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실리기도 했다.<ref>명종실록 1권, 명종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7월 7일(정묘) 3번째기사 "윤인경 등이 인종이 명종을 해치려 한다고 한 윤원로에 대한 치죄를 청하다"</ref>
 
==== 을사사화에 가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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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재역 벽서 사건과 기로소 입사 ====
{{참고|정미사화|양재역 벽서 사건}}
[[이언적]]을 공격하는데는 반대하였고 참여하지 않았지만, 기타 [[윤임]] 일파를 공격하는 등 [[을사사화]]에 참여한 공로로 그는 그해 [[8월 30일]]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 l등이 되고, 우의정 겸 병조 판서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9월]]초 우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는 것이 부당하다며 스스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조선 명종|명종]]이 듣지 않았다. 이어 병조판서직은 그대로 유지한채 그해 [[10월]]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의정부좌의정 겸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판서직의 수행이 어려워 45년 겨울 스스로 판서직 사임을 청하였으나 이때에도 역시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한편 [[이황]]을 [[을사사화]]에 연루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자, 조카 [[이원록]]의 권고로 [[이황]]이 죄가 없음을 들어 서용해줄 것을 청하여 성사시켰다.
 
[[을사사화]]가 해결된 후 [[원상]](院相)의 한사람으로 [[조선 명종|명종]] 재위 초반의 서정을 주관하였다. [[1547년]](명종 2년) [[의정부]][[좌의정]]으로 겸[[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는 것을 두고 정권을 동시에 쥐는 것이 부당함을 세번 간하여 겸임 병조판서직에서 면직되었다.<ref>명종 5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년) 5월 15일(을축) 1번째기사 "좌의정 이기가 겸임한 병조 판서의 체직을 세 번 청해 허락하다"</ref> [[1547년]]말의 [[양재역 벽서 사건]] 관련자 처벌 상소에 가담하였다. 이어 의정부좌의정으로 실록 총재관을 겸했다가 바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한편 이무렵에 그를 반대한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1548년]] 권력을 농단하고 전횡을 한다는 이유로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이기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여러 번 올려졌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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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4월]] [[한성부]]에 흙비가 내리자 재변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해 [[11월]] 영관상감사를 겸하고,
[[1551년]] [[5월]] 신병으로 정장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은 그를 위로하고 반려하였다. [[5월 30일]]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되었다가 [[6월 23일]] 봉상시 제조(奉常寺提調)가 되었다. [[6월 25일]]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그해 [[8월]] [[사헌부]]에서 그가 병으로 출사하지 못함을 들어 체직을 청하였으나 [[조선 명종|명종]]이 반려하였다.<ref>명종실록 12권, 명종 6년(1551 신해 / 명 가정(嘉靖) 30년) 8월 17일(임신) 2번째기사 "사헌부에서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는 영의정 이기의 체직을 청했으나 불허하다"</ref>
 
그해 [[8월]] [[중풍]](中風)이 발병하였다. 이후 거동이 어렵게 되자 [[8월 19일]] 그는 직접 정장을 올려 [[중풍]]으로 사직을 청하여 사퇴하였다. 이어 [[조선 명종|명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고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전직했다. [[8월 23일]] 풍성 부원군(豊城府院君)에 임명되어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할 권한이 주어졌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그가 음흉하며 왕 이상의 권력을 누린다며 비판하였으나 [[조선 명종|명종]]은 이를 듣지 않고 무마시켰다. [[9월]]말에는 [[윤원형]]을 다시 [[의정부]][[우의정]]으로 복직시킬 것을 여러번 청하였으나 [[조선 명종|명종]]이 거절하였다.
 
=== 최후 ===
그는 사사로운 원한이라도 있으면 바로 앙갚음을 하였으므로 조정의 대소 관료들도 그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1551년]] [[10월 24일]] 홍문관 부제학 조사수(趙士秀), 직제학 이탁(李鐸), 전한 윤춘년(尹春年), 응교 우상(禹鏛), 부응교 정종영(鄭宗榮), 교리 정유(鄭裕)·이감(李戡), 부교리 왕희걸(王希傑), 수찬 허엽(許曄), 부수찬 김귀영(金貴榮)·유순선(柳順善), 저작 김여부(金汝孚) 등으로부터 재변과 국정 운영 엉망을 이유로 탄핵을 당했다. 이후 매일 양사에서 그를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11월 2일]]부터는 그를 쫓아낼 것을 상소하였다. 11월 10일 참찬관 권철(權轍)이 그가 이기가 방납미(防納米) 3백여 섬을 빼돌리고, 공납(貢納)할 물건을 기한 내에 관사(官司)에 납부하지 않았으며, 흉년기때 곡식을 내주는 것을 거부한 것을 폭로하였다.<ref>명종 12권 6년 11월 10일 (갑오) 1번째기사 / 조강에 나가자 참찬관 권철이 이기의 비리를 말하다</ref> 같은날 대간이 두 차례 그를 탄핵하자 파직당하였다.<ref>명종 12권 6년 11월 10일 (갑오) 3번째기사 / 양사에서 이기와 이무강의 찬축을 두 번 청하자 이기를 파직시키다 </ref> 그러나 [[1551년]] [[12월 28일]] [[조선 명종|명종]]은 그가 공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영중추부사로 복직시켰다. 이후 대간에서 그의 서용을 취소하라고 하였으나 명종이 거부하였다.
 
[[1552년]](명종 7년) [[1월 2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조사수(趙士秀) 등이 차자를 올려 그를 탄핵하였다. 이후 [[1월 3일]]부터 [[4월 5일]]까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으로부터 매일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그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명종은 좌부승지(左副承旨) 남응운(南應雲)을 보내 그를 문병하였다.<ref>명종 13권, 7년(1552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8일(경진) 2번째기사 "영부사 이기의 병이 위급해져 좌부승지를 보내 문병하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