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량 (151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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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요직 역임, 고속 승진 ====
이후 [[예조]][[정랑]]을 거쳐 58년 [[5월]] [[병조]][[정랑]]이 되고 명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그해 [[6월]] [[사간원]]헌납(獻納)이 되었다. [[1558년]] [[7월]] 왜국 사신의 행동을 제대로 감찰하지 못했다 하여 대사간 윤인서(尹仁恕), 사간 이지신(李之信) 등 [[사간원]] 관원이 동시 사퇴할 때 함께 대기하였으나 [[조선 명종|명종]]의 특별배려로 그해 [[7월 15일]] 수찬(修撰), [[7월 27일]]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후 [[홍문관]] 수찬(修撰), 교리(校理), [[10월]] [[사헌부]] 지평(持平) 등의 삼사와 언관직을 주로 역임하였다. 그 뒤 그가 [[조선 명종|명종]]의 총애를 받게 되자 대소 문무관 중에 그의 심복을 자처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환관 [[정번]](丁蕃)은 그에게 정보를 주고받으며 그의 심복이 되었다. 그 뒤 한때 그의 세력에 빌붙던 김규와는 [[1557년]] 한 기생을 놓고 다투기도 한다. [[1558년]]초 [[홍문관]] 교리, [[사헌부]][[지평]], 그해 12월 다시 [[병조]][[정랑]]이 되었다. 한편 [[윤원형]] 세력을 견제하려던 [[심통원]]이 그와 결탁, [[심통원]]일파와 함께 박소립(朴素立) 등을 공격, 배척하였다.
 
[[1559년]] [[1월 9일]]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가 1월 22일 다시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러나 59년 2월 [[홍문관]]으로 다시 옮겨 [[2월 6일]] 부응교(副應敎)가 되고 독서당 학사(讀書堂學士)로 시사(試射)에 선발되었다가 그해 [[3월 8일]] 다시 [[홍문관]] 응교, [[5월 15일]] [[홍문관]] [[전한]]을 지냈다. 이후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배경으로 하여 세력을 확대시킨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명종의 의지로 [[6월 23일]] 승지로 발탁되었다. 이후 [[6월 23일]] 다시 [[승정원]]동부승지로 발탁된 뒤, 부제학 등으로 요직에 임명되었으며, 바로 초고속 승진하여 바로 당상관이 되었다.
 
원래 [[조선 명종|명종]]은 그에게 [[승지]]직을 과거 급제 직후 초배(超拜)하려고 하였으나 언론의 반대로 그 일을 어렵게 여기다가 마침내 전례(前例)를 끌어대어, 집의, 사간, 부응교 이상을 지낸 자도 아울러 승지에 추천할수 있도록 이조(吏曹)에 명해서 이량을 특별히 승지로 임명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계속 그의 성품이 어리석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그때마다 [[조선 명종|명종]]은 그를 특별히 후원해주기도 했다. [[1559년]] [[7월 24일]] 왕명으로 유전(柳㙉), 정윤희(丁胤禧), [[박순]](朴淳) 등과 함께 [[중국]]의 고사를 그린 화족(畫簇) 4척(隻)을 선물로 받고, 여기에 십운 배율(十韻排律)의 시제(詩題) 4수를 그림 위에 지어 보냈다.
 
==== 관료 생활 ====
그 뒤 우승지로 발탁되었으며, [[1559년]] [[10월 2일]] 우승지로 [[조선 명종|명종]]의 명을 받아 내관(內官) 최한형(崔漢亨)과 함께 [[평양부]](平壤府)에 가서 [[조선 태조|태조]]의 어용(御容, 어진)을 봉심(奉審)하고 돌아왔다.
 
{{인용문2|우리 태조께서 천운에 부응하여 나라를 여셨다. 어용을 개성부(開城府)·경주(慶州)·전주(全州)·평양·함흥(咸興)에 봉안(奉安)하였는데, 개성부에는 해마다 봉심했으나 다른 곳은 한번도 봉심하지 않았으니 선조를 받드는 뜻에 어그러져 매우 미안하다. 가서 봉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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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병조]][[참지]],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이조]][[참판]], [[동지]][[성균관]]사를 역임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1560년]] [[4월]] [[심통원]]과 함께 압력을 행사하여 [[과거 시험]] 합격이 취소된 [[신사헌]]의 복과를 상소하여 성사시켰다. 이무렵 이양은 특별히 임금의 후대를 받아 갑자기 고위직에 올랐는데도 기세가 대단했다 한다. [[1560년]] [[5월 12일]] [[병조]] [[참지]], [[6월]] [[승지]]가 되었다. [[6월 2일]] 서경(西京, 평양)의 산천(山川)과 누관(樓觀)의 경승(景勝)을 그려왔으며, 이때에 화사(畫史)에게 명하여 채색을 칠하여 병풍을 만들게 하고, 또 정유길(鄭惟吉)에게 명하여 시(詩)를 짓게 하한 뒤 그에게는 명하여 기(記)를 짓게 하였다. 1560년 [[6월 11일]] 다시 [[승정원]] [[도승지]]가 되고 [[7월 3일]] [[예조]][[참판]]이 되었다.
 
[[1560년]] [[7월 20일]], 다음날 인견을 명받고 특별히 왕을 인견하였으며 [[7월 24일]]에는 [[세자빈]] 간택례가 5일 지체되었다 하여 [[예조]] [[판서]] [[정유길]] 이하 다른 [[예조]]의 관리들과 함께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지만 왕이 무마시켰다. [[8월 24일]]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8월 19일]] 다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때 그는 [[조선 명종|명종]]의 총애를 받아 실권을 누렸는데, [[윤원형]]의 세력이 그에게 빼앗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윤백원]]은 과거 시험 고시관으로 2개의 시험장의 시험문제를 동일한 문제를 내는 것으로 항의하기도 했다.<ref>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1560년 경신 / 명 가정(嘉靖) 39년) 9월 10일(계유) 1번째기사 </ref> 그해 [[10월 4일]]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때 [[좌찬성]]인 [[홍섬]]과 알력이 생겨 왕을 찾아가 홍섬을 비난하였다. 홍섬은 [[10월 18일]] 좌찬성직을 사퇴하고 [[세자이사]](世子貳師)직에서도 해임된다.<ref>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1560 경신 / 명 가정(嘉靖) 39년) 10월 18일(경술) 1번째기사 </ref> [[11월 16일]]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1561년]] [[1월]] 왕이 특별히 유생들에게 내린 주제로, 원춘부(元春賦)의 춘자(春字) 압운(押韻)을 주제로 한 봉서를 정유길(鄭惟吉), [[허엽]](許曄) 등과 함께 받아 [[성균관]] 유생들에게 전달했다.
 
[[1561년]] [[4월 3일]]에는 상진(尙震)·이준경(李浚慶)·심통원(沈通源)·김명윤(金明胤)·정사룡(鄭士龍)·권철(權轍)·오겸(吳謙)·정유길(鄭惟吉)·신희복(愼希復) 등과 함께 [[고시관]]의 한사람이 되어 [[유생]]들에게 강경 시험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시험의 합격자 중에 그의 아들 [[이정빈]]이 있어 이것이 문제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