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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최초의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ref>문옥배, 《한국찬송가100년사:해설,역사》 (예솔출판사, 2002) 530쪽</ref>
 
[[1902년]]에 윤치호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가 애국가의 원형과 같다는 자료도 나타났다. [[2006년]] [[2월 27일]]에는 박정규(朴正圭) 한남대 교수가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단재 순국 7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문 ‘신채호의 국내에서 쓴 글에 대한 고찰’중에서 애국가의 원형이 된 노래도 함께 발표하였다.<ref name="shin"/> [[신채호]]가 지은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2월 7일 신채호 배(拜)'라고 쓴 노래와 함께 발견된‘애국가’도 있었다.
이 애국가는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김인식(金仁湜, 1885년 ~ 1963년)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ref name="shin"/>
 
[[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f name="dosan1"/> 애국가의 원작자로는 윤치호 설이 유력하다. 한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 단독작사설을 심의했을 때 찬성 11표, 반대 2표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하여 결정을 유보하였고, 그 이후 애국가에 작사자에 대한 결정은 없었다. 따라서 현재 애국가의 공식적인 작사자는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