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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모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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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北學議)는 [[조선 정조]] 때 [[북학파]]인 [[박제가]]가 쓴 책이다. 정조 2년([[1778년]]) 이덕무 등과 함께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청의 수도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 개설 ==
 
《북학의》는 서명응과 [[박지원|박지원(朴趾源)]], 그리고 저자인 박제가 자신이 쓴 서문과 함께 내(內)ㆍ외(外) 2편으로 나뉜다. 그의 스승인 박지원이 쓴 서문에 따르면 박제가는 연경(燕京, 북경)에서 농사, 누에치기, 가축 기르기, 성곽 축조, 집 짓기, 배와 수레 제작부터 기와, 인장, 붓, 자를 제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눈여겨보고 마음으로 따져보면서, 눈으로 알 수 없으면 꼭 물어보고 마음으로 따져서 이상한 것은 반드시 배웠다고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저들의 풍속 가운데 본국에서 시행하여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할 만한 것은 눈에 띄는 대로 글로 기록했고, 그것을 시행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 그렇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폐단을 첨부해 하나의 학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맹자|맹자(孟子)]]》에 나오는 진량의 말을 인용해 책의 이름을 지었다"고 말하며, "이용과 후생은 한 가지라도 갖춰지지 못하면 위로는 정덕을 해치는 폐단을 낳는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이 날이 갈 수록 곤궁해지고 국가 재정은 날이 갈수록 고갈되는데 사대부는 팔짱 낀 채 보기만 하면서 구제하지도 않는가?"라며, 백성을 위해 사대부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것을 강조한다.
 
==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