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나크사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기원전 5세기 그리스; 예쁘게 바꿈
29번째 줄:
 
== 영향 ==
그리스의 군인이자 작가 크세노폰에[[크세노폰]]에 따르면, 그리스의 중무장 부대가 그들의 적들을 두번이나 궤주시켰다고 한다. 이 와중에 오직 한명의 그리스인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바로 전투가 끝난 후에애 그리스군은 키루스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들의 승리가 무의미해 졌으며, 원정은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식량도, 고용자도, 믿을 만한 친구도 없이 광대한 제국의 중심부에 버려졌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동맹자 아리아에우스(Ariaeus)를 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고귀한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페르시아 인들로부터 성공을 위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을 근거로 그리스인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리스 용병단은 페르시아의 총독인태수인 팃사페르네스(Tissaphernes)[[티사페르네스]]에게 자신들을 고용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그들을 거절하였고, 그리스 용병대 역시 그에게 항복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팃사페르네스는티사페르네스는 커다란 문제를 남겨 놓았다. 그것은 바로 처음의 돌격으로 패하지 않은 많은 중무장 군대를 남겨놓은 것이다. 그는 그리스 인들에게 식량을 지원하였고, 어느 정도 기다린 후에 그리스 용병대를 그들의 고향이 있는 북쪽으로 이끌었다. 그러는 동안 팃사페르네스는티사페르네스는 아리아에우스와 그의 우익 경무장 부대를 그들 나름의 이유로 그리스 용병대와 떼어놓았다.
 
그리스의 사령관들은 어리석게도 축연을 위한 팃사페르네스의[[티사페르네스]]의 초대를 수락하였다. 그들은 포로가 되어 왕에게 보내졌고, 그곳에서 목이 베어졌다.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사령관들을 뽑고 [[쿠르디스탄]]과 [[아르메니아]]를 통해 흑해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들, 1만인의 행군의 최종적인 승리는 크세노폰의[[크세노폰]]의 저작 [[아나바시스]](Anabasis)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세계에 페르시아가 나약하다는 생각을 빠르게 알렸으며, 결과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페르시아 정복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 참조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