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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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이후 규장각 제학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 [[의정부]][[우의정]] 겸 삼군부사를 지냈다. 그는 평소 [[민치록]]의 양자가 된 [[민승호]]와 [[민겸호]] 형제를 경멸하여 멀리하였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민승호에게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런데 민승호에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민비는 가까운 친척을 배척하고 촌수가 좀 먼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ref name="hwang40">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40페이지</ref> 그러자 [[민태호]]는 반대하였고 그의 동생 민규호가 형을 협박했다. "천의(왕후의 뜻)를 어찌 감히 어기겠소? 양자를 보내어 함께 부귀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소이까?" 그래서 [[민태호]]의 아들 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갔고, 뒤이어 민규호는 [[이조판서]] 겸 도통사가 되었다.<ref name="hwang40"/> 그 뒤 [[1878년]] 와병 중 [[의정부]]영의정이 되었다가 다시 우의정으로 고쳐 임명되었으나, 7일만에 죽었다. 예서, 행서,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다. 충헌(忠獻)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