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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평양군(平陽君) [[박석명]](朴錫命)의 손자이자<ref name="ljh">이중화, 《21세기에서 바라본 조선의 궁술(한국의 몸짓 우리의 대표 신체문화 국궁)》 김이수 역, 한국학술정보, p.260, ISBN 9788926806586</ref>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박거소(朴去疎)와 청송 심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심온]]의 막내딸로 [[소헌왕후]]의 동생이었는데 박중선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이모부인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의 집에서 자랐다.<ref>《단종실록》즉위년(1452) 10월 29일 1번째 기사</ref> 어려서 홀로 스승을 쫓아 공부하였고, 일찍부터 무예에 소질을 보여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다.<ref name="ljh"/> [[1460년]] 무과에 장원급제한 박중선은 당대의 세력가 [[한명회]]의 눈에 들어 출세가도를 달렸고<ref name="lhw">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조선 역사의 56가지 진실 혹은 거짓)》, 21세기 북스, 2009, p.220, ISBN 9788950918941</ref> 6년만에 병조참판의 지위에 올랐다. 박중선은 무인 출신으로 세조와 성향이 잘 맞았으며<ref>신명호, 《조선왕비실록(숨겨진 절반의 역사)》 역사의 아침, 2007, p.197</ref> 세조가 야간 사냥을 나설 때 호위를 하기도 했다.<ref name="sdj">신동준, 《왕의 남자들》 브리즈, 2009, p.154~p.155, ISBN 9788994013022</ref> [[1466년]] 딸을 [[월산대군]]과 결혼시켜 세조와 사돈을 맺었다.<ref>《세조실록》 12년(1466) 8월 19일 3번째 기사</ref> 이듬해에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적개공신 1등으로 녹훈되고<ref name="sdj"/> 할아버지의 작호였던 평양군(平陽君)으로 봉해졌으며 벼슬 또한 [[병조판서]]로 높아져 30대 초반에 병권을 틀어쥐었다.<ref name="lhw"/> [[1468년]]에는 [[남이]]의 옥사에 공을 세워 정난익대공신(靖難翊戴功臣) 3등에 녹훈되었고,<ref>《예종실록》 즉위년(1468) 10월 28일 3번째 기사</ref> [[1471년]]에는 [[조선 성종|성종]]의 즉위에 공을 세워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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