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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인물정치인 정보
 
| 이름 = 박희광( <br /> 朴喜光)
{{인물 정보
| 이름 = 박희광(朴喜光)
| 출생지 = {{국기나라|대한제국}} [[경상북도]] [[구미시|선산군 상고면]] [[선주원남동|봉곡리]]<br />(現 [[경상북도]] [[구미시]] [[선주원남동|봉곡동]])
| 사망지 = {{국기나라|대한민국}} [[서울]] 서울 보훈병원
| 학력 = 만주 봉천성 남성자학교 졸업
| 직업 = 독립운동가, 사업가
| 소속경력 = 의열단, 부단장 <br /> 前 통의부 판의단, 단장 <br /> 前 참의부 이사장 <br /> [[국민의당 (1963년)|국민의 당]] 전임고문 <br />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
| 예명 정당 = 상만(相萬)[[무소속]]
| 생애 출생일 = [[1901년]] [[2월 15일]] ~ [[1970년]] [[1월 22일]]
| 사망일 = {{사망일과 만나이|1970|1|22|1901|2|15}}
| 종교 = [[무종교]] → [[천주교]]([[세례명]] : 시메온) → [[무종교]]
| 배우자 = [[유문기]]
| 자녀 = 장남 근용, 차남 정용, 정희, 선용, 수용
| 부모 = 아버지 박윤하(부):항일 항일의병활동독립운동가 겸 의병장)
| 웹사이트 = [http://www.parkhuikwang.or.kr 공식 사이트]
| 수상 =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
| 웹사이트 = http://www.parkhuikwang.or.kr
| 각주 =
| 기타 =
}}
 
'''박희광'''<ref>{{뉴스 인용|제목 = 애국지사 박희광 항일 암살단 활약상, 독립신문서 보도 |url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9628&yy=2011 |출판사 = 매일신문 |저자 = 전병용 기자 |날짜 = 2011-02-28 |확인날짜 = 2016-07-08}}</ref> (朴喜光, [[1901년]] [[2월 15일]] ~ [[1970년]] [[1월 22일]])은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예명은 상만(相萬)이다. 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義烈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계열 판의단(判義團)에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와 함께 조직된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만주에 있는 펑톈(奉天, 봉천, 지금의 [[선양]]) 총영사관 습격, 친일파 및 고관(高官) 암살, 임시정부와 항일독립운동단체에 군자금 및 무기 조달, 만철연선 일본 군경 기습작전 등에 참가하였다.
 
1949년 6월, [[김구]]는 자택인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갑작스런 총격을 당하면서 박희광을 비롯하여 김구의 일부 측근들은 흩어지거나 정치적인 희생양이 된다. 이당시는 너도나도 애국자이던 시절로, 박희광의 독립운동 업적을 증명할 방법이 쉽지 않았다.
 
박희광은 요양과 안정을 위해 44세의 만혼으로 [[문화유씨문화 유씨]](文化柳氏)를 맞아 고향으로 이주후 가정을 꾸렸으며, 1968년 3월1일3월 까지1일까지 독립운동활동 업적에 대한 빛을 보지 못한채 형무소에서 배운 기술로 양복점을 경영하게 된다.
 
이 시기 김구 선생에게 받은 위로금으로 대구시 칠성동(대구역 주변)에 정착하였으며, 짐수레(손수레) 10여 대와 설비를 구입하여 고아들에게 국화빵(풀빵)과 아이스크림 등을 만들어 생활 할 수 있게끔 자립을 지원 하였으나, 옥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쉬는 날이 많아 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힘든 생활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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