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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국조오례의]]의 내용이 정리되면서 불교 양식이 일부 섞여 있었던 초기 조선왕릉의 능제도 국조오례의를 통해 조선시대만의 양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병풍석의 문양에 방물과 방패무늬가 제외되었고, 고석이 4개로 감소하였으며, 축문을 불태우던 소전대가 예감으로 대체되었다.<ref>이호일, 위의 책, 79쪽</ref> 그리고 국조오례의로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종 때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8768&mobile&categoryId=200001079 네이버 지식백과 - 신도비]</ref>
 
[[광릉]]을 조성할 당시,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라는 [[조선 세조|세조]]의 유언에 따라 회격으로 능실을 조성하고, 병풍석에 있던 십이지신상 문양을 난간석으로 옮겨 새기게 되었다. 이 때 왕릉 조성에 드는 인력과 비용이 크게 절감되어 후대 왕릉의 모범이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D%9A%8C%EA%B2%A9+%EC%82%B0%EB%A6%89+%EC%9C%A0%EB%AA%85&keyword=%ED%9A%8C%EA%B2%A9+%EC%82%B0%EB%A6%89+%EC%9C%A0%EB%AA%85 예종 1권 즉위년 9월 22일 (무인) 2번째기사 / 원상들이 능침에 석실을 쓸 것을 건의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ref> 또한, 처음으로 서로 다른 언덕에 조성하는 동원이강릉의 양식으로 조성하는 등 광릉은 초기 조선왕릉의 양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ref>이호일, 위의 책, 111쪽.</ref>
 
[[조선 성종|성종]]의 부친 의경세자가 [[조선 덕종|덕종]]으로 추숭됨에 따라 그의 무덤도 추봉되었는데, 석물을 왕릉의 양식으로 갖춰야 할지 논쟁이 있었으나, 선왕([[조선 목조|목조]], [[조선 익조|익조]], [[조선 도조|도조]], [[조선 환조|환조]])의 전례에 따라 기존의 양식으로 보존되었다. 이 후 덕종의 [[경릉 (조선 덕종)|경릉]]은 추존왕의 왕릉의 표본이 되었다.<ref>이호일, 위의 책, 119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