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191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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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 = 이정은(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부모 = [[이규원 (1890년)|이규원]](부), 윤씨 부인(모)
|친척 = [[이하영]](
|생애 = [[1916년]] [[3월 10일]] ~ [[1983년]] [[2월 10일]] (68세)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br /> [[대한민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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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경주 이씨|경주(慶州)]]
|주요 참전 전투/전쟁=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서훈 내역= {{욱일장|6}}
|기타 이력= [[유신정우회|대한민국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br /> 대한민국 국회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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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 전후 ====
1950년 [[수도방위사령관|육군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국 전쟁]]을 맞았고, 수도사단장과 제3사단장을 역임하며 매우 힘들고 어려운 한국전쟁 초기에 과묵하지만 냉정하고 침착한 지휘와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휘하 장교들과 병사들의 신임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1950년 7월 수도사단장에 부임할 당시, 전임 수도사단장 [[김석원]]은 자신이 매우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물러나는 다소 껄끄러운 상황에서도 후임으로 부임하는 이종찬의 결연한 모습을 보며 크게 안심하며 부하들을 맡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50년 9월초 3사단장으로서 포항 부근의 형산강 지역을 맡아 방어중일 때 대대적인 인민군의 공세 앞에서 후퇴가 불가피하게 될 경우 자결한다는 결의로 분전, 끝내 형산강 일대를 지켜냈다. 10월 1일에는 3보병사단 전병력을 이끌고 국군과 UN군 가운데 최초로 38선을 넘어서 북상하기도 했다. 그 뒤 [[제병협동본부]]([[육군보병학교]]의 전신) 본부장을 거쳐 1951년 6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바로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1952년 5월 [[부산 정치 파동]] 때 대통령 [[이승만]]의 군부대 동원 명령을 거부하여 곧바로 해임되었다. 1952년 5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키려고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자동적으로 계엄사령관이 된 그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군의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려는 훈령을 내렸다. 이때의 기개 때문에 이종찬에게는 '참군인'이라는 평판이 평생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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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용문 (군인)|이용문]], [[박정희]] 등으로부터 쿠데타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때 대통령 이승만의 부당한 계엄군 차출요구와 이를 기화로 미국이 사실상 묵인하고 이용문과 박정희는 쿠데타를 기도하였다.
1952년 7월 참모총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듬해
=== 생애 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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