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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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근처에서 태어난 하이드리히는 아버지가 음악학교장이라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하이드리히는 국가보안본부장이 되어서도 일과를 마치고서는 [[음악]]으로 피로를 풀곤했다.
 
나이가 너무 어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할 수 없었던 하이드리히는 [[1922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24년]] 사관후보생이 되었고 [[1926년]]에는 소위, [[1928년]] 중위에 임관되었다. 사관후보생이 되자 하이드리히는 발트함대 정치부에 지원했다. 이때 경험은 나중에 크게 유익하다.
 
일찍 정치에 관심한 젊은 하이드리히는 [[1918년]]에 [[독일 국민청년연맹]]에 가입했다. 그러나 연맹의 온건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곧 탈퇴하고 [[독일 민족공수연맹]]에 새롭게 가입하면서 당시 우익계 군인으로 창설된 우익계 준군사 조직 중 하나인 [[할레 의용대]]에 가담하기도 했다. 해군적을 가지고 해군 장교로서 복무하면서 우익계 군사 조직에 가입한다.
 
촉망받는 젊은 해군 장교였던 하이드리히는 사생활 문제로 군복을 벗고서 [[친위대 (나치)|SS]]로 옮겨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이때 사건은 정확한 진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나중에 국가보안본부장이 되면서 관련 기록을 하이드리히가 없앴기 때문이다(비단,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처녀를 강간했다는 설, 돈을 훔쳤다는 설, 약혼녀와 파혼하려 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확실한 사실은 없지만, 당시 해군 군법회의가 모종 사건으로 하이드리히를 재판했고 장교로서 있을 수 없는 행위했다는 이유로 사직을 권고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이때 재판관은 [[에리히 레더]]로서 후일 독일 해군 총사령관이 된 사람이다.
 
해군에서 나온 하이드리히는 한동안은 실직자로 거리를 누비던 중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행사장 경비를 맡았던 사람들과 어울렸고 평소 견지하던 정치 신념과 유사한 나치당에 가입했다. 나치당에서는 하이드리히의 경력과 경험을 평가했고 곧 [[하인리히 히믈러]]의 눈에 띄어 [[1931년]] 가을, SS 소령으로 임명하고서 [[뮌헨]]으로 불러들였다. [[1932년]] 7월, 히믈러는 기존 SS부대별로 2명에서 3명씩 배치되던 정보 임무 담당자를 모아 [[SS보안방첩부]]를 조직하고 하이드리히를 SS 대령으로 승진하게끔 하여 방첩부장으로 앉혔다. 하이드리히가 이제 본격으로 전면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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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5월 27일]],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대리 하이드리히가 [[체코슬로바키아]] [[레지스탕스]]의 공격을 받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 사건은 [[영국]]의 지원을 받은 [[얀 쿠비츠]]와 [[요제프 가베크]]가 시도한 암살 사건이었다.
 
아침 출근길에 [[아우토반|베를린-프라하 간 고속도로]]에서 권총과 폭탄 공격을 당한 하이드리히는 즉시 시립병원으로 옮겨졌고, 당시 [[프라하]]에서 가장 솜씨 좋은 외과의사인 [[호올 바흠]]이 수술했다. 폐와 복부에 파편이 꽂혀 있었고, 중상이었다. 수술 후 하이드리히는 회복 조짐을 보였으나 [[6월 3일]] 위독상태에 빠졌다. 힘러가 2명의 전속 의사를 급히 파견했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6월 4일]] 아침에 하이드리히는 사망했다. 검시 해부 결과 비장 절제 때문에 일어난 화학 현상으로 발병한 가슴 중앙부의 염증이 사인이라고 공식 기록되었다.
 
다만, 히믈러가 파견한 의사들의 노력이 나중에 오히려 하이드리히의 죽음을 재촉했다는 설도 있다. 하이드리히를 발탁한 것은 히믈러였지만, 이 무렵 히믈러와 하이드리히의 관계는 극악의 라이벌 관계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하이드리히를 최초로 수술한 바흠은 전후에 나치 협력자로 체포되어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이 자는 지뢰 제거 작업에 투입되었으나, 지뢰가 폭파하여 중상을 입었고, 아무도 치료하려 하지 않으려 하여 [[라이프치히]]로 옮겨졌으나, 그 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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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급 전공십자장 수훈자]]
[[분류:폭발물에 죽은 사람]]
[[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