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성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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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미사화 ===
 
봉성군이 유배를 떠나고 1년이 지난 1547년(명종 2년) 음력 9월 18일, 부제학 [[정언각]]이 [[한강]] 이남의 양재역<ref>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인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404113&mobile&categoryId=2275 네이버 지식백과 〈양재역〉] 참고</ref>에서 한 장의 익명서를 발견하고 이를 명종에게 고하였다. 당시 익명서에는 "여주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 그믐날." 이라는 내용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이며, 을사사화의 여파로 일어난 사화로 [[정미사화]]라고 칭하기도 한다<ref name="Yangjae">《조선왕조실록》명종 6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년) 9월 18일(병인) 3번째기사</ref><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0414&mobile&categoryId=200000329 두산백과 〈정미사화〉]</ref>. 당시 이 사건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사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ref>{{서적 인용
|저자= 이한우
|제목=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쪽= 77
|출판사= 해냄
|날짜= 2008-05-15
|id= ISBN 978-89-7337-8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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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손자 : [[심열]]
 
== 출처 및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