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성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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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윤원형 일파는 애초에 윤임 등의 역모를 다스릴 때에 그 처벌을 가벼이 했기 때문이라고 간하고, 이어 윤임 일파는 물론이고 봉성군에 대해서도 모조리 죽일 것을 간하였다. 이때 명종은 [[계림군]]에계림군에 대해서만 사사를 명하였는데, 당시 이 사건을 《실록》에 기록한 사관은 [[이기 (1476년)|이기]] 일파가 윤임 일파를 역적으로 몰아버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봉성군마저 죽일 것을 간한 것은 너무 심한 처사라며 비판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6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 26년) 9월 18일(병인) 3번째기사</ref>. 그러나 이후에도 봉성군을 죽이라는 상소는 계속되었으나, 명종은 전혀 윤허하지 않았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6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 26년) 윤9월 4일(임오) 3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명종 6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 26년) 윤9월 14일(임진) 4번째기사</ref>.
 
한편 당시 [[홍문관]]에 재직 중이던 [[이황]]도 봉성군을 죽이라는 [[차자]]를 올렸다고 그 제자가 증언하였다<ref>{{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