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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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역'''(黃射, ? ~ ?)
==생애==
[[건안]]
건안 5년([[200년
▲[[건안]](建安) 4년([[199년|199]]), 여강태수(廬江太守) [[유훈 (자대)|유훈]](劉勳)은 [[손책]](孫策)의 공격을 받아 유기성(流沂城)으로 퇴각하면서 황조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황조는 황역에게 유훈을 돕게 했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유훈은 손책에게 격파당하였고, 곧 유훈은 [[조조]](曹操)에게 몸을 의탁하였기 때문에 황조는 철군하였다. 손책은 그대로 하구(夏口)까지 진격하였고, 황조의 처자식 7명을 사로잡았다.
▲건안 5년([[200년|200]]), 손책이 피살당하고 그의 동생 [[손권]](孫權)이 즉위하였다. 손권의 대에 황역은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시상현(柴桑縣)을 공격하였다.<ref>《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건안 11년([[206년|206]])에 황조의 부장 [[등룡]](鄧龍)이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시상을 공격하였다가 [[주유]](周瑜)에게 사로잡혔다는 기록이 있으나, 본문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ref> 그러나 손권 휘하의 별부사마(別部司馬) 겸 시상장(柴桑長)인 [[서성 (동오)|서성]](徐盛)이 병사 200명을 이끌고 황역을 공격하였고, 황역은 크게 패하였다.
==일화==
▲한편 황역은 [[예형]](禰衡)과 친밀하였고, 그를 황조에게 소개하였다. 처음에는 황조 또한 예형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의 불손한 언행을 참지 못하고 죽였다. 황역은 이를 만류하려 하였으나, 당시에 황조와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황조는 곧 이를 후회하였고, 예형을 후하게 장사지내었다.
어느 날, 황역은 예형과 함께 외출하였다가 어떤 무덤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둘은 묘비를 읽고 떠났다. 한참 후 황역이 예형에게 말하였다.
{{인용문2|아까 보았던 비문은 정말 명문이었는데, 베껴가지 않은 것이 참 유감입니다.}}
예형이 답하였다.
{{인용문2|경(卿)은 묘지의 주인 이름만 기억하실 테지만, 저는 한 번 보고도 모두 암기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비문을 써내려갔는데, 마지막 한 글자만은 비석의 글자가 떨어져나가 있었기 때문에 분명하지가 않았다. 예형은 글자의 반쪽을 쓰고는 말하였다.
{{인용문2|아마 이 글자였을 것인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황역이 보니 그 글자가 맞았다.
==출전==
*[[진수 (서진)|진수]], 《[[삼국지]]》 권10 위서10 순욱순유가후전 · 권46 오서1 손파로토역전 · 권54 오서9 주유노숙여몽전 · 권55 오서10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
*[[갈홍]], 《[[포박자]]》 권47 탄예
== 각주 ==
<references/>
[[분류:삼국지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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