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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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1월 1일 피아치의 세레스 발견은 가우스가 커다란 행성들에 의해서 방해받은 미행성의 운동에 관한 이론에 대한 작업을 하도록 이끌었다. 이 작업은 《천체 운동론》({{llang|la|Theoria motus corporum coelestium in sectionibus conicis solem ambientum}}, [[원뿔 곡선]]을 따라서 태양을 공전하는 천체 운동론)이라는 이름으로 [[1809년]]에 출판되었다. 피아치는 세레스의 움직임을 단지 2달동안 밤하늘을 가로질러서, 3도 만큼만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때, 세레스는 태양 빛 뒤로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몇 달 뒤 세레스가 다시 나타났을 때, 당시의 [[수학|수학적]]인 방법들로는 3도(전체 궤도의 1%)의 부족한 데이터로부터 위치를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피아치는 그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당시, 13세였던 가우스는 그 문제에 관해서 직접 듣고 달려들었다. 석 달동안 집중해서 작업을 한 뒤에, 그는 세레스의 최초 발견으로부터 약 1년 뒤인 1801년 12월의 위치를 예측했고, 이 예측은 0.5도 내에서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그는 또한 [[18세기]]의 궤도 예측에 대한 그 성가신 수학을 합리화했다. 《천체 운동론》으로 몇 년 뒤에 출판된 그의 업적은 천문학적인 계산에 대한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가우스 인력상수]]를 제시했고, 오늘날에는 측정 오차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모든 과학에 사용되는 최소제곱법을 포함하고 있었다. 1809년에 가우스는 정규 분포 오차 가정하에 그 방법을 증명할 수 있었다. 최소제곱법은 [[1805년]]에 이미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가 발표하였지만, 가우스는 자신이편지들과 1795년부터사후에 발견된 방법을논문들을 사용했다고통해서 주장했다가우스가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파일:Bendixen - Carl Friedrich Gauß, 1828.jpg|thumb|《천문학 소식지》({{llang|de|Astronomische Nachrichten}})에 실린 가우스의 초상화(182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