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 (군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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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당시에는 대좌 계급으로 [[평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복 후 바로 상경하여 이응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 모임인 [[계림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군사 단체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인사가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1949년 10월 한국군이 북한 상인과 북한산 북어를 밀무역하여 이익을 챙긴 이른바 '북어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두고 국방부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을 거론하였다가 강제 예편 당하였다. 이듬해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사단장으로 현역 복귀하여 [[조선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브루스 커밍스는 그가 김일성의 아내 김혜순의 죽음과 상관이 있다는 루머가 있다고 말했다.<ref>[http://www.hani.co.kr/arti/SERIES/231/396630.html 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한겨레신문]]</ref>
 
브루스 커밍스는 그가 김일성의 아내 김혜순의 죽음과 상관이 있다는 루머가 있다고 말했다.<ref>[http://www.hani.co.kr/arti/SERIES/231/396630.html 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한겨레신문]]</ref> 그러나 이는 아무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며, 저명한 학자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일본 관동군 노조에 쇼도쿠(野副昌德)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가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 중 1940년 4월에 제2방면군장(第二方面軍長) 김일성의 처라는 김혜순(金惠順)을 체포하였다.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가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에 대해 보도했는데, 김혜순이 전향하여 항일연군 귀순을 위한 선무 공작 제1선에 나섰다고 하였다.<ref>[http://srchdb1.chosun.com/pdf/i_archive/index.jsp?Y=1940&M=7&D=5&x=59&y=10 金日成의 愛妻가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 - 소설같은 전향의 경위] 조선일보 1940년 07월 05일 석간 2면</ref> [http://news.joins.com/article/3933762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이 1970년 일본에서 나가시마 다마지로(長島玉次郞)를 직접 만나 당시 일에 대해 증언을 들은 바로는 김혜순은 나가시마의 집에서 같이 머물며 그 부인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ref>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317~318]</ref><ref>[http://news.joins.com/article/1381671?ctg= 진위 김일성 열전(41) 동북 항일 연군 내의 2대 김일성|2대 김일성의 입만과 군사 활동] 중앙일보 1974년07월18일<br>
[http://news.joins.com/article/1381872 진위 김일성 열전 (42) 항일연군의 최후|이명영(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0 종합 3면<br>
[http://news.joins.com/article/1382085 진위 김일성 열전 (43)2대 김일성의 정체(상)|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3 종합 3면<br>
[http://gangnam.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382288&sc=&mc= 진위 김일성 열전 (44)2대 김일성의 정체(하)|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5<br> [http://gangnam.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382546&sc=&mc= 진위 김일성 열전 (45) 입소 이후의 2대 김일성] [중앙일보] 1974-07-29</ref> 그녀가 북한 김일성의 처가 맞는지는 지금도 논란이 되지만 적어도 해방 때까지 살아있었던 것은 분명하고, 그 후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김석원과는 일면식도 있을 수 없고 해방 후 행방도 알려진 바 없는 여자의 죽음에 어떻게 그가 관련될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북한에서는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을 [[미군]] 주도의 북침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 북침 계획 과정에 참가한 대한민국 국군 측 인물로 김석원을 언급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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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7-06-29
}}</ref> 그러나 당시 복무 기록 등에는 김석원이 함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북한 측이 일본군 '''74연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간삼봉 전투"가 있었다고 하는 날짜(1937년 6월 30일) 직후인 1936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는 "'''78연대''' 소속 대대장인 김석원 소좌"가 탑골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일본어 버전 역시 간삼봉에 김석원이 참가했다는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실제 간삼봉 전투가 일부 일본군 파견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소소한 총격전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소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 부대와 맞붙었던 일본군을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서울 용산연대의 김석원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로 당시 함흥연대 소속이었던 [http://db.history.go.kr/id/im_101_03034 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 이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이 되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80200209101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8-02&officeId=00020&pageNo=1&printNo=5269&publishType=00010 王公族附武官 李王垠 附屬步兵 少佐 金仁旭 補 步兵第七十四聯隊附 (咸興)] 동아일보 1935-08-02 조간 1면 13단<br>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703y00_02.pdf 金仁旭少佐 驍勇은 聯隊의 誇이다 : 新乫坡對岸의 討匪壯烈戰과 咸興聯隊當局者談]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7월 03일 면수:06 단수:15<br>
[http://db.history.go.kr/id/su_003_1915_05_26_0290 今日 卒業한 日本士官學校 第27期] 매일신보(每日申報) 1915.6.18</ref> 여러 사람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잘 밝혀져 있다.<ref>[http://news.joins.com/article/393376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261~264</ref> 극작가 [[오영진|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처남의 장인이 김인욱이라 당시 일에 대해서 김인욱 본인의 말을 정확히 전해 들었던 사람이다. 해방 직후 평양에 있을 때 김일성과 몇 차례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 김인욱 아닌 김석원이 당사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고,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ref>오영진(吳泳鎭, 1916-1974), 『蘇軍政下의 北韓 - 하나의 證言 -』, 서울, 중앙문화사(中央文化社), 1952. 06. 10.
(서울, 국토통일원, 1983, 재발간) 재간본 pp.98~100</ref> 북한 측이 김인욱 아닌 김석원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과 간삼봉 전투 당사자인 [[김일성 가짜설|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가짜]]라는 증거일 뿐이다.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하였다. 김인욱은 평안남도 용강군(平安南道 龍岡郡) 출신으로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1956년]] 예편한 뒤 이후 동업자 [[원윤수 (1887년)|원윤수]]와 함께 설립한 [[성남고등학교 (서울)|성남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목록|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김석원 생존 중에 성남고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2003년]] 친일파 논란과 관련된 항의<ref>{{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