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티스트 콜베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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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출처 필요|날짜=2013-12-12}}
[[파일:|이름 = 장바티스트 콜베르 <br /> Jean-Baptiste Colbert.jpg|thumb|장바티스트 콜베르]]
|그림 = Jean-Baptiste Colbert.jpg
'''장바티스트 콜베르'''({{llang|fr|Jean-Baptiste Colbert}}, [[1619년]] [[8월 29일]] ~ [[1683년]] [[10월 6일]])는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치가이다.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1665년부터 1683년까지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세비녜 부인]]은 그에게 “북쪽 사람”이란 별칭을 붙였는데 콜베르가 차가운 성품에 냉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요하게 일에 매달렸고 검소한 생활로 인해 존경받았다. 그는 [[산업]]을 부흥시키고 [[파산|도산]] 상태의 경제를 회생시켰다는 평판을 얻었다. 역사가들은 콜베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루이 14세의 과도한 지출로 인해 프랑스의 [[빈곤]] 해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림 설명 = 콜베르의 초상화
|출생일 = [[1619년]] [[8월 29일]]
|출생지 = [[프랑스]] [[랭스]]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683|10|6|1619|8|29}}
|사망지 =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
|직업 = [[정치인]], [[경제학자]]
|종교 = [[로마 카톨릭]]
}}
'''장바티스트 콜베르'''({{llang|fr|Jean-Baptiste Colbert}}, [[1619년]] [[8월 29일]] ~ [[1683년]] [[10월 6일]])는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치가이다.정치가로 [[루이 14세]] 치하의아래에서 [[프랑스1665년]]에서부터 1665년부터 1683년까지[[1683년]]까지 재무장관을 역임했다역임하였다. [[세비녜 부인]]은 그에게 “북쪽 사람”이란 별칭을 붙였는데 콜베르가 차가운 성품에 냉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요하게 일에 매달렸고 검소한 생활로 인해 존경받았다. 그는 [[산업]]을 부흥시키고 [[파산|도산]] 상태의 경제를 회생시켰다는 평판을 얻었다. 역사가들은 콜베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루이 14세의 과도한 지출로 인해 프랑스의 [[빈곤]] 해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프롱드의 난]] 당시 콜베르는 왕령 법정의 중개인으로 근무하면서 [[귀족]]에 의해 위기에 처한 [[루이 14세]]의14세의 왕당파를 위해 일했다. 이 일로 망명중이던 [[쥘 마자랭]] [[추기경]]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는 [[산업]]을 부흥시키고 [[파산]] 상태의 경제를 회생시켰다는 평판을 얻었다. 역사가들은 콜베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루이 14세의 과도한 지출로 인해 프랑스의 [[빈곤]] 해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생애 ==
그는 [[1619년]] [[랭스]]의 직물상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예수회]] 대학을 졸업하고 [[장 샤플랭]]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파리 (도시)|파리]]의 [[은행]]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21세가 되던 [[1640년]] 육군성에서 감찰관으로 근무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1648년]] 있었던 [[프롱드의 난]] 사건 당시 악명을 얻게 되었다. [[1648년]] 마리 샤롱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100,000 [[리브르]]를 [[지참금]]으로 준비하였다. 그의 결혼에는 콜베르가 50,000 리브르를 "직업을 이용해 끌어들였다"고 언급되어 있다.
 
콜베르는 [[무역 수지]] 개선과 [[식민지]]에 의한 수입을 중요시 하였다. 콜베르는 [[베네치아]] [[유리]]와 [[플란데런]] [[천 (옷감)|옷감]] [[제조업|제조]]를 도입하는 [[시장 (경제)|시장]] 개혁을 단행했고 [[보베]]에 왕실 [[테페스트리태피스트리]] 작업장을 설립하였다. 콜베르는 [[공공사업]]의공공사업의 증진과 [[관세]]를 통해 [[경제]]를경제를 증진하였다증진시켰다. 해외에 대해서는 그의 재임 직전 창립된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통하여 [[커피]], [[목화]], 염료용 [[목재]], [[모피]], [[후추]], [[설탕]] 등을 들여왔으며 이를 위해위하여 [[해상 운송]]을운송을 설립하였다.
=== 프롱드의 난 ===
[[프롱드의 난]] 당시 콜베르는 왕령 법정의 중개인으로 근무하면서 [[귀족]]에 의해 위기에 처한 [[루이 14세]]의 왕당파를 위해 일했다. 이 일로 망명중이던 [[쥘 마자랭]] [[추기경]]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Authority control}}
=== 마자랭의 죽음과 콜베르의 등장 ===
재상이었던 [[마자랭]]의 망명 당시 [[루이 14세]]는 콜베르에 대해 점차 신임하게 되었다.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하자 콜베르는 그의 숨겨둔 재산을 찾아내었다. [[1664년]] 콜베르는 궁전 관리인이 되었으며 [[1665년]] 재무장관이 되었다. [[1669년]]에는 해군성 장관과 상무성, 식민성 장관 및 궁정 관리인을 겸하게 되어 짧은 기간이었으나 전쟁을 제외한 모든 국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콜베르는 [[무역 수지]] 개선과 [[식민지]]에 의한 수입을 중요시 하였다. 콜베르는 [[베네치아]] [[유리]]와 [[플란데런]] [[천 (옷감)|옷감]] [[제조업|제조]]를 도입하는 [[시장 (경제)|시장]] 개혁을 단행했고 [[보베]]에 왕실 [[테페스트리]] 작업장을 설립하였다. 콜베르는 [[공공사업]]의 증진과 [[관세]]를 통해 [[경제]]를 증진하였다. 해외에 대해서는 그의 재임 직전 창립된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통하여 [[커피]], [[목화]], 염료용 [[목재]], [[모피]], [[후추]], [[설탕]] 등을 들여왔으며 이를 위해 [[해상 운송]]을 설립하였다.
 
{{기본정렬:콜베르, 장바티스트}}
{{Authority control}}
 
[[분류:프랑스의 역사]]
[[분류:1619년 태어남]]
[[분류:1683년 죽음]]
[[분류:프랑스의 정치인재무부 장관]]
[[분류:프랑스의 역사경제학자]]
[[분류: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
[[분류:루이 14세]]
[[분류:랭스 출신]]
[[분류: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