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켈리아 원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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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라 회의]]에서 실현한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회의가 끝난 지 얼마 후 [[시라쿠사이]]는 [[레온티노이]]의 민주파와 과두파의 대립에 개입하여 과두파를 지지했다. 결국 외세의 통치 가능성이 레온티노이 시민을 단결시켰고, 두 파도 합심하여 시라쿠사이에 대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테네는 [[기원전 422년]]에 시켈리아에 사절을 보내 시라쿠사이와의 전쟁 가능성을 모색했지만, 얻을 것은 없었다.<ref>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4</ref> [[기원전 418년]], 그러나 다시 시켈리아에서 분쟁이 생겼고, 아테네가 기원전 422년에 원정을 떠날 기회가 현실이 되었다. [[기원전 420년]]대에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있던 [[세게스타]]가 [[셀리노스]](현재의 [[셀리눈테]])의 공격을 받아 서전에 패배하고 아테네에 구원을 요청해왔다. 아테네의 지원을 얻기 위해, 세게스타 시민은 아테네 함대의 비용을 부담할 충분한 자산을 가지고 있다고 호소하고, 우선 60 [[달란트]] 분의 은괴를 제공했다. 그리고 아테네 사절에게 그들이 가진 모든 돈과 값 비싼 물건을 곳곳에서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실제보다 부유하게 보이도록 속였다.<ref>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6.8</ref><ref>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6.46</ref>
 
==원정 과정==
===논란===
[[세게스타]]의 사절은 아테네의 [[민회]]에 개입을 호소했다. 민회의 의견은 그때까지의 주장에 따라 두 가지로 갈렸다. 결국 민회는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했지만, 병력은 삼단노선 60척에, 중장보병은 파견하지 않기로 했다. 원정군은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와 [[라마코스]] 3명이 이끌게 되었다. [[투키디데스]]는 니키아스의 임명은 그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민회에서의 논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