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창: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7번째 줄:
그 후 맹지상의 3남 맹창(孟昶)이 제위를 이었다. 천연의 요해에 있던 촉은 외부의 적을 걱정하지 않아서 좋았고, 군대를 내부의 감시로 돌려 권력을 유지했다. 전촉이 발전시켰던 농업, 양잠업을 계속해서 발전 유지시키며, 문인의 보호에 힘을 기울였다. 맹창은 수도 성도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몰두하여 성내(중국의 도시는 대체적으로 성채도시였다) 여러 곳에 부용화(芙蓉花)을 심어 성도성은 별명이 부용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오대(五代)가 후진에서 후한으로 대체되는 혼란을 틈타 진(秦),계(階), 성(成), 봉(鳳)의 4주(현재의 감숙성 천수을천수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빼앗았다. 그러나 후한에서 후주로 교체되고, 명군 세종(世宗:시영)이 등장하자 [[955년]] 사천을 빼앗겨 버렸다. [[960년]] 송나라가 건국되자 맹창은 북쪽의 북한과 손을 잡고 송나라에 대항했으나, 저항은 수포로 돌아가 [[965년]] 송나라에 병합되었다.
 
맹창은 카이펑으로 연행되어, 진국공(秦國公)에 봉해졌으나 그해 사망하였다. 사후 초왕(楚王)의 칭호가 추봉(追封)되었고, 시호는 공제(恭帝)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