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 (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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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96년, 회남왕 영포는 반란을 일으키고, [[오 (전한)|형나라]]를 공격해 형왕 [[유고]]를 죽이고 형나라를 병합해 군대를 모조리 빼앗았으며, [[초 (전한)|초나라]]까지도 무찔러 [[유교 (초원왕)|원왕]]을 설현(현 [[짜오좡 시]] [[텅저우 시]])으로 도주하게 했다. 그러나 추에서 고조와 싸워 지고 파양으로 달아났다 처남 [[오신 (전한)|장사성왕]]의 꾀에 빠져 농민에게 죽었다. 고조는 영포가 모반을 일으키자 어린 아들 회남여왕 [[유장 (회남여왕)|유장]]을 영포 대신 회남왕으로 삼았고, 여왕은 수춘을 서울로 삼았다.
 
기원전 174년, 여왕의 반란 모의가 들통나 여왕은 촉으로 유배 가는 길에 자결했고 회남나라는 폐해졌다. 여왕의 네 아들들은 기원전 172년에 복권돼 맏아들 [[유안 (전한)|유안]]은 부릉후에, 둘째아들 [[유발 (제북정왕)|유발]]은 안양후, 셋째아들 [[유사 (형산왕)|유사]]는 양주후, 막내아들 유량(劉良)은 동성후에 봉해졌다.
 
기원전 168년, [[전한 문제|문제]]가 회남나라를 부활해, [[유희 (성양공왕)|성양공왕]]을 성양나라에서 옮겨와 왕노릇 하게 했다.
 
기원전 164년, 문제가 회남나라를 나눠 여왕의 세 아들에게 주니, 옛 회남나라의 내사지만이 회남나라가 돼 여왕의 맏아들 부릉후 [[유안 (전한)|유안]]이 왕노릇했다. 형산군은 둘째아들 안양후 [[유발 (제북정왕)|유발]]의 나라가 됐고, 여강군과 예장군은 셋째아들 [[유사 (형산왕)|유사]]의 나라가 됐다. 동성후는 이미 죽었기에 왕위를 받지 못했다. 성양공왕은 성양나라로 돌아갔다.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회남왕 유안도 난에 동참하고자 했다. 그러나 승상이 독단으로 조정 편에 섰고, 또 조정의 구원군을 받았기에 왕국은 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