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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월 [[내선일체]]를 적극 지지하는 성향의 잡지사인 [[동양지광]]사가 창립될 때 이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2월에는 [[동양지광]] 창간기념으로 마련한 행사인 '강연과 영화의 밤'에서 '전시체제하의 산업보국'이란 연제로 강연했다. [[1939년]] 7월 사상 전향자들을 중심으로 일본정신 파악, 내선일체 강화, 사상 정화, 품성 연마등을 목표로 결성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경성지부 제4분회장을 맡았다. 이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상임간사로 쭉 활동하게 된다.
 
[[1940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복귀했고, 같은 해 5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내지순례단'의 일원으로 일본 각지의 '성지' 순례 및 총후 각오를 다지는 참선등을참선 등을 하고 귀국했다. 8월에는 [[동아일보]] 취체역을 그만두고그만 두고 감사역에 취침해 [[1942년]] 8월까지 재임했다.
 
[[파일:장덕수 매일신보.jpg|썸네일|280px|right|1943년 11월 22일자 [[매일신보]].]]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 겸 후생위원회 위원을 맡았고, 12월에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해소하고 사상전향 공작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대화숙]]에 참여했다. 이후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때까지 대화숙이 주최한 군가와 강연의 밤 행사등에 여러 차례 시국 강연을 나섰으며,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임전보국단]] 간부로 활동했다. [[1945년]] [[7월]] [[국민의용대]] [[경성부]]연합 간부로 피선되는 등 [[조선총독부]]에서 조직한 각종 어용단체에서어용 시국강연에단체에서 여러번시국 나서는등강연에 활동했었다여러 번 나섰다.
 
이 밖에도 신문, 잡지 등에 수많은 많은친일 친일성향의성향의 논설글과논설문과 학도병 권유문등권유문 등을 기고했다. [[중일전쟁중일 전쟁]] 이후의 행적때문에행적 때문에 뒷날 [[한국독립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친일파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대상자로 지목되었다.
 
====== 반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