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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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인종이 왕세자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자 중종은 이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생모도 일찍 여읜데다 병약하였고, 윤임은 그것을 염려하였다.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잡았을 때 윤임은 [[김안로]]와 함께 동궁(인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틈이 생겼다. 그 후 윤원형 일파는 윤임이 경원대군(명종)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퍼뜨려 모함했으며, 윤임은 또 [[윤원형]] 형제가 인종을 해치려 한다는 설을 조작하여 대윤과 소윤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조선 중종|중종]]은 불문율에 부치기로 하고 이들의 갈등을 중재한다. 그러나 대, 소윤의 알력은 가라앉지 않고 벌어졌다.
 
그 뒤 [[자헌대부]]로 승진, [[병조판서]], [[호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역임하였고 [[의정부]]참찬을 거쳐 숭정대부로 승진했다. [[판서]]로 근무할 때 문서는 반드시 손수 초고를 작성하여 낭료는 감히 한 마디도 보탤 수가 없었고, 지켜보는 사관들도 흠을 잡지 못했다 한다. 또한 사람들도 역시 사사로운 것으로 간여할 수 없었다. 견리의 옥사을옥사를 처리함에 원통해하거나 지체된 경우가 없었고 [[호조판서]]로 재직 중에는 관용품을 남용하는 간사한 아전들을 적발하여 처벌하기도 했다.
 
[[1544년]](인종 1년) [[조선 중종|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다시 [[형조]][[판서]]를 거쳐 파은군에 봉작되고,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이어 [[윤원로]], [[윤원형]]을 파직, 조정에서 축출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문정왕후가 대신 정사를 돌보았다. 곧이어 [[판돈녕부사]]로 전임되었고, 이에 크게 세력을 얻은 [[윤원형]]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제거하였다. 이때 [[사림파]]인 [[유관]]과 [[유인숙]] 역시 그의 당으로 몰아 제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