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유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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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 [[유진 (고려)|유진]](劉瑨, ? ∼ 1019년) :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대원현(大原縣) 출신이다. 척족(戚族)가문에서 태어나 광종 때 벼슬길에 나와 내승지(內承旨)가 되었다. 목종 때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고, 현종이 즉위한 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으며, 1011년(현종 2)에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 이듬해에는 문하시랑을 지냈다. 1014년 검교태사 수문하시중(檢校太師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 1018년에 백성들에게 전염병이 유행하고 절후가 어긋나는 것은 형정(刑政)의 시기가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임금에게 아뢰어 자못 재상의 여망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여러 왕에 걸쳐 항상 근직(近職)에 있으면서 왕을 보필하고, 외직에 보임된 적은 없었다.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105&cid=49632 『고려사』 권94, 열전7]</ref>
* [[유권열 (고려)|유권열]] : 충주유씨 집안 출신으로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도움. 광평시중을 역임
 
* [[유신성 (고려)|유신성]] : 광종의 묘정에 배향된 배향공신. 태부에 추증.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의 음기(陰記)에 ‘신성아찬(新城阿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찬’은 신라의 직함이다. 고려 광종의 외가인 충주유씨 가문 출신의 인물로서, 광종의 신임을 얻어 조정의 중책을 맡아 활약하고 최고위 관위에 올랐던 명신(名臣)이다.
 
* [[유진 (고려)|유진]](劉瑨, ? ∼ 1019년) :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대원현(大原縣)충주 출신이다. 척족(戚族)가문에서 태어나 광종 때 벼슬길에 나와 내승지(內承旨)가 되었다. 목종 때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고, 현종이 즉위한 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으며, 1011년(현종 2)에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 이듬해에는 문하시랑을 지냈다. 1014년 검교태사 수문하시중(檢校太師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 1018년에 백성들에게 전염병이 유행하고 절후가 어긋나는 것은 형정(刑政)의 시기가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임금에게 아뢰어 자못 재상의 여망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여러 왕에 걸쳐 항상 근직(近職)에 있으면서 왕을 보필하고, 외직에 보임된 적은 없었다.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105&cid=49632 『고려사』 권94, 열전7]</ref>
 
* [[유징필]](劉徵弼, ? ∼ 1042년) : 고려 전기의 재상.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1013년(현종 4)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서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뒤에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어 1020년의 복시(覆試)를 주관하였다. 1022년 한림학사 비서감에 제수되고, 다음해에 또다시 거란에 사행(使行)하였다. 1024년에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지공거(知貢擧)로서 이자연(李子淵)을 장원으로 뽑았다. 1030년 태자빈객(太子賓客)에 보임되었으며, 1032년(덕종 1)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그리고 상서우복야를 거쳐 1036년(정종 2)에는 참지정사 겸 서경유수사(參知政事兼西京留守使)가 되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다음해에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서경유수사로 승진하였다. 1040년 문한(文翰)으로서 현종·덕종·정종 3대를 보좌한 공로가 인정되어 아들 작(綽)에게 공부서령사(工部書令史)를 제수하는 공음(功蔭)이 베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