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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을 제1대 [[대한민국 국회|제헌국회]](制憲國會)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은 [[윤보선]]을 자신의 국회의장 비서로 채용했다. 그러나 [[한민당]]에 의해 [[내각 책임제]]가 언급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하며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하였다.
 
[[7월 12일]] 이날 기념사를 통해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이 정부가 대한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또한 건국의정부 수립의 대장전이 되는 제헌헌법은 다음과 같이 그 전문을 선포했다.<ref name="dong1948717">[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6/05/02/200605020500006/200605020500006_1.html ‘대한민국號’ 첫 선장 이승만과 미국의 동상이몽]</ref>
 
{{인용문|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 제도를 수립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해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해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ref>이후 그는 대통령 직에서 퇴임하고 이후에도 서신에 단기를 사용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3월]]까지 공식 문서에 단기를 사용한다.</ref>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ref name="dong1948717"/>}}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영부인 및 4명의 수행원([[정한경]] · [[김양천]] 비서 · [[김동성 (1890년)|김동성]] 공보처장 · [[이정순]] 공보국장)이 수행하였다. 1박2일의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대한민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나서, 초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주일 미국대사관저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와 1차 회담을 가진 이승만은 이날 밤 더글러스 맥아더의 저택으로 초대되어 함께 축배를 들었다. 이 방문은 맥아더의 방한에 대한 답방형식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17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7&officeId=00032&pageNo=4&printNo=9068&publishType=00020 | 제목 = 秘錄 韓國外交<28> : 政府樹立 직후 ⑩ | 날짜 = 1975-3-17 | 출판사 = 경향신문}}</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101900329201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10-19&officeId=00032&pageNo=1&printNo=632&publishType=00020 大統領今日渡日]〉 경향신문(1948년 10월 19일) 1쪽. <!--“...李承晩大統領은 夫人 同伴하여 ... 聯合國總司令官 「맥아더」元帥에 對한 答禮次로 드디어 今 十九日 今朝 金浦空港을 떠나 東京으로 向發하였는데...이번 同行하는 隨行員은 다음 같다. 鄭翰景 博士 秘書 金良千氏 公報處長 金東成氏 公報局長 李貞淳氏”--></ref> 11월 6일 [[여수·순천 사건]]에 따른 국가위기를 맞아 수습책을 국회에서 발표하였다.
 
제3차 [[국제 연합 총회]](파리, 1948년 12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한국대표단의 노력으로 간신히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12월 12일) 이승만은 재외공관 설치작업을 서둘렀다. 우선, 대미외교에 있어서 이승만은 국제 연합 총회를 마치고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귀국을 준비 중이던 [[장면]]을 대한민국 정부의 특별대표(Special Representative, 특사)로 임명(12월 27일)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12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2&officeId=00032&pageNo=4&printNo=9064&publishType=00020 | 제목 = 秘錄 韓國外交<26> : 政府樹立 직후 ⑧ 美中國에 特使館| 날짜 = 1975-3-12 | 출판사 = 경향신문 |인용문=<!--政府승인 外交를 위해 趙炳玉, 張勉 두 특사를 세계 각국에 파견한 李承晩 대통령은 友邦과 어떤 형태로든 外交관계를 맺어 새로 수립된 정부가 국제적 고립을 면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따라서 在外公館 설치작업을 서두르게 된 李대통령은 ... 유엔총회를 마치고 귀국중인 張勉 박사로 하여금 美國에 그대로 머물러 駐美 대사관 창설 작업을 착수하도록 지시했다. ...--> }}</ref>
 
[[파일:Syngman Rhee in 1949.jpg|thumb|left|160px|대통령 취임 초기 ([[1949년]] 무렵)]]
==== 친일파 청산 반대 의혹 ====
{{참고|반민족행위처벌법}}
이승만은 오랜 망명생활로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하였고, 해방 직후 가졌던 좌익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우익, 친일파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하였다. 귀국 초기 대동단결론을 주장하며 "선통일, 후친일파 청산"을 주장하였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친일관리를 대거 등용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1>다시찾는 우리역사, 한영우 저, 경세원, 579p.</ref>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제정된 법률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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