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 토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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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욕선수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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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그는 다락에 올라가 그 목사의 조언을 따른다.
 
회심을 한 5년뒤인 1991년에1891년에 그는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채, 그의 첫번째 교회에서 목사로 섬기기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그의 44년간의 목회사역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목회는 장로복음주의 교단의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C&MA)라는 곳에 속해 있었다.
33년간은 많은 교회에서 목사로 섬긴다. 그의 첫번째 사역지는 웨스트 버지니아, 너터 포트에 위치한 작은 상가에 있는 교회였다. 토저는 30년간(1928-1959) 시카고 위치한 Southside Alliance Church에서 목사로 섬겼으며, 그의 마지막 사역은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Avenue Road Church에서 섬기게 된다. 그는 현대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지켜보며 교회가 세상적 가치와 타협하는 위험한 단계에 있다고 느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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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저는 7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6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두었다. 그는 소박했고 물질주의와 반대되는 삶을 살았다. 그과 그의 아내 Ada Cecelia Pfautz는 차를 가져본적이 없으며 버스와 기차를 선호했다. 그가 저명한 기독교 작가가 된 이후에도 그의 로열티 수익의 대부분을 필요한 이들을 위해 양도했다.
 
그의 마지막 목회지이자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Avenue Road Church에서 6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그는 그가 10대시절 회심한 오하이오주 아콘에 있는Ellet 묘지에 안장된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A.W 토저 –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적혀져있다. 그의 마지막 메세지인 “교회안에서 시들어가는 그리스도의 주권” (영문: The Waning Authority of Christ in the Churches)이라는 기사는 그가 죽은지 삼일후인 1963년 5월15일날 출판된다. 그의 자서전가인 제임스 L. 스나이더는 “어떤면에서 그의 마지막 기사는 그의 가슴속의 걱정을 담은 그의 고별사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