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만종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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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1세는 시칠리아의 왕위를 이용해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몰아내고,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하여 지중해를 제패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카를로 1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칠리아 왕국을 자신이 다스리는 제국의 식민지처럼 다뤘다. 시칠리아 귀족들은 왕국 정부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고, 해외 식민지에서 쏟아지는 부는 카를로와 그의 프랑스 및 나폴리 출신 신하들이 독차지했다. 한편 카를로는 시칠리아 왕국과 관계없는 해외원정을 위해 시칠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한편 카를로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비잔티움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와, 왕비 콘스탄체를 통해 시칠리아 왕위를 노리고 있던 [[아라곤 연합 왕국]]의 [[페드로 3세 (아라곤)|페드로 3세]]는 시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반란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 반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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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곤의 개입 ==
교황이 시칠리아 시민들의 자유민 지위를 거절하자, 시민들은 만프레디의 딸이자 프리드리히 2세의 후계자인 [[아라곤 연합 왕국|아라곤]] 왕비 [[콘스탄체 (아라곤 왕비)|콘스탄체]], 그리고 국왕 [[페드로 3세]]에게3세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페드로 3세는 이를 받아들여 콘스탄체와 함께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다.
 
반란 직전 페드로 3세는 대규모 함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교황이 함대의 목적을 묻자 페드로는 아라곤의 교역을 방해하는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시칠리아인들이 왕위를 제안했을 때 페드로와 그의 함대는 편리하게도 시칠리아 섬에서 300km 떨어진 [[튀니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페드로는 교황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왕위에 관심이 없는 척 했으나, 며칠 후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향했다. 페드로는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하여 9월 2일 [[팔레르모]]에 입성했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페드로에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자유민의 지위를 바랐던 시민들에게 페드로의 즉위는 외국인 왕이 다른 외국인 왕으로 바뀐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페드로가 옛날 노르만 왕인 [[굴리엘모 2세]]가 주었던 것과 같은 특권을 시민들에게 약속함에 따라, 시민들은 페드로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페드로는 9월 4일 팔레르모 성당에서 시칠리아의 페드로 1세로 즉위했다.<ref>Runciman, Sicilian Vespers, p. 228.</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