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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두 가계력을 중심으로 정리 함. 참고 이병권, 2016「 시흥시의 한국양명학연구」,『京畿鄕土史學』제21집, 京畿道文化院聯合會)
 
== 생애 ==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어려서 조실부모하여 현종 때 우의정을 지낸 할아버지 도촌 정유성 밑에서 자랐다. 일찍이 [[학문]]에 뜻이 있어 백가(百家)에 통달하였고, [[윤증|박세채와 윤증박세채]]와 윤증의 문인이다. [[조선 숙종|숙종]] 때에 6품(六品)·대성(臺省)·방백(方伯)의 벼슬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전생애의 대부분을 학문 연구에 바쳤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곧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20여세 때부터 [[양명학]](陽明學)에 심취(心醉), 41세에 안산(현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楸谷)으로 이거하여 당시 학계와 정계에서 [[이단]]으로 몰려 배척당하면서도 조선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학변學辯 존언存言 저술) , 그의 이러한 학문은 비판적인 그의 학풍과 함께 61세 이후 강화(霞谷)로 이주하여 [[신작]](申綽)·[[이광사]](李匡師)·[[유희]](柳僖) 등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왕양명]]의 학설 중 제일의(第一義)라고 할 수 있는 '치량지설(致良知說)'의 '양'(良)이 '지'(知)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치지'의 '지'(知)가 지식의 '지'(知)가 아니라 선천적 지혜라고 했다. 그러므로 '양'(良)는 생래적으로 얻은 혜명(慧明)한 선천적 지성을 뜻한다고 했으며, '양지'가 있으므로 경험이 가능하고 지식을 지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성현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속에 흐르는 [[논리]]가 중요한 것이요, 논리보다도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양지가 더욱 귀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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