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첸 전투 (163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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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에서 양군의 사상자 및 행방불명자을 합치면 9,000명을 넘는다. 황제군은 전장에서 모든 대포을 남기고 철수했고, 프로테스탄트군은 이것을 모두 포획했다. 전술적으로 보면 황제군의 진지을 제압하고, 모든 대포을 빼앗고 철수까지 시킨 점에서 프로테스탄트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전략적으로도 그후 발렌슈타인은 라이프치히에서 후퇴하여 보헤미아로 이동했기 때문에 작센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군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문에 [[개신교]] 군이 지불한 댓가는 매우 컸다. 사상자 숫자을 비교해보면 약 3,000명의 황제군에 비해 개신교 군은 2배인 약 6,000명 가량을 잃었다. 특히 스웨덴군 중앙의 피해가 매우 커서 제 1열에제1열에 배치했던 청색연대, 황색연대는 병력의 ⅔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두 부대는 고참용병으로 구성되어 있는 스웨덴군 주력이기도 했기에 이 손실은 필연적으로 전력의 저하을 초래하게 되었다. 또한 황색연대 지휘관으로써 보병 제 1열의제1열의 지휘관이기도 했던 닐스 부라에는 이 전투에서 받은 부상으로 인해 2주후에 사망했다. 그리고 [[11월 29일]](신력) 옛 보헤미아왕 팔츠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사망소식을 듣고 순식간에 졸도하였고, 얼마안가 페스트로 사망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손실은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죽임이었다. 스웨덴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도 왕의 죽음은 치명적인 상실이었다. 스웨덴에서는 급히 독일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악슬 옥슨쉐르나]]가 젊은 [[크리스티나]]을 여왕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섭정이 되어 그녀를 보좌했다. 옥슨쉐르나는 하이르브론동맹을 결성하여 개신교 진영의 결손을 굳히는것과 더불어 프랑스에 원조을 요청하여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사망후 군대의 유지에 안간힘을 다했다. 군대의 지휘는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른하르트]]와 [[구스타프 호른]]이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