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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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은 단순한 적자/흑자로만 평가되긴 좀 어려울 뿐더러,더군다나 근거라고 제시한 게 일본 출처불명의 혐한사이트라니..이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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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공에 대한 의문점은 매우 많다. 춘추전국시대나 한나라 시대까지만 해도 조공을 핑계로 주변국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적이 많았으며, 요구하는 내용도 전혀 손해가 아니었던 기록이 많다.(보물 몇 개 주고 성이나 영토를 내놓으라든지, 심지어 조공이나 선물을 준다고 해놓고 길을 뚫어주자 군대를 보내 그대로 침공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사람들도 유교적 사상을 그리 따르지도 않았었다. 밑에 명나라와의 조공도 대표적으로 말 조공에 대한 논란이 많다. 명나라가 값을 후하게 쳐주기는 했지만 수량을 부담이 갈 정도로 많이 요구하여(황엄은 태종 9년에 군마 1만 필을 요구하였는데 조선 목장에서 기르는 말 보유량이 전성기 때 2 ~ 4만 필이었다. 조선이 몰락하는 후기로 가면 5천 필까지 떨어진다.) 막상 조선에는 조랑말만 남는 현상이 심했으며 그 결과 말안장의 높이만 40 ~ 50cm가 훨씬 넘어가는 특대 안장이 탄생하기도 했다. 일반 안장을 가지고 조랑말을 타면 발이 땅에 끌리기 때문이다.
 
청나라와의 조공은 그 자체로만 한정하면 조선의 10배 이상 손해였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301&index_id=cp03010473&content_id=cp030104730001
 
조공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시기가 다른 내용의 기록을 무리하게 엮어내기도 하는만큼 엄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남경태는 여진과 일본이 내심 결코 자신들이 조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조선의 조공은 항상 적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기존의 조공 관계 해석에 대한 의문을 표하고 있다. http://deepredpigment.myartsonline.com/kcs.html
 
명나라 때도 처음에는 그다지 유리한 조건이 아니라 태종이 조공 중지를 명나라에 요청하기도 했었고 세종도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명나라에 친서를 올려 처녀와 금은 조공은 부담이 심하니 명나라에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의 계속된 요청은 1430년(세종 12년)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세종 때 명에 의해 면제가 되었으나 세종 사후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이 다시 부활하기도 했고,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중종 때에 가서야 완전히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