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숙 (1898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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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국기|대한민국}}(최종 국적) <br /> {{국기|중화민국}}(前)
|필명 = [[법명]]은 태허(太虛) <br /> 초기 [[법명]]은 성숙(星淑) <br /> [[호 (이름)|아호]]는 운암(雲巖) <br /> 가명은 규광(奎光), 충창(忠昌), 창숙(昌淑), 성숙(星淑)
|학력 = 대한독립학교 졸업 <br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1956년)
|직업 = 불교 승려 <br /> 독립운동가 <br /> 정치인 <br /> 정당인 <br /> 시인 <br /> 군인 <br /> 사상가 <br /> 前 대한독립군 대위
|종교 = [[불교]]
|웹사이트 = [http://www.kimsungsuk.or.kr/ 운암김성숙 기념사업회]
}}
'''김성숙'''(金星淑, [[1898년]] [[3월 10일]] ~ [[1969년]] [[4월 12일]])은 [[대한민국]]의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이자 [[불교]] [[승려]] 겸 [[시 (문학)|시인]]이자 前 [[대한독립군]] [[대위]]이며, 정치가이다. 승려 생활을 하다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3월]] 3·1운동 때 봉선사(奉先寺)의 승려로 양주(楊州)의 광천시장(光川市場) 시위 주모자로 체포되어 1년 간 복역하였고,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단체들을 조직하며 항일활동을 하였다.
 
== 주요 전력 ==
승려 생활을 하다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3월]] 3·1운동 때 봉선사(奉先寺)의 승려로 양주(楊州)의 광천시장(光川市場) 시위 주모자로 체포되어 1년 간 복역하였고,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단체들을 조직하며 항일활동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중화민국|중화민국 본토]]에 거주하다가 [[광복절|8·15 광복]] 이후 고국에 귀국하여 [[1969년]] [[4월 12일]]에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노환으로 병사한 그는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입각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외교위원 등의 직위 활동을 하였고, [[1945년]] [[5월]] [[이승만]]의 [[소련]] 비난을 문제삼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주미대사]]직 해임을 주장하였으나 실패했다. 해방 이후 [[1945년]] [[12월]] 임정 귀국 제2진의 한사람으로 귀국하였다. 그 뒤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협상]]론과 단정 수립론이 대두되자 단정 수립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독립노동당]], [[신민당 (1967년)|신민당]] 등의 창당에 참여하였으며, 이승만.박정희 독재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분류:대한민국의 승려]]
[[분류:대한민국의 사회주의자]]
[[분류:대한민국의 사회민주주의자]]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조선민족혁명당]]
[[분류:철산군 출신]]
[[분류:황푸군관학교 동문‎]]
[[분류:국방대학교 동문]]
[[분류:근로인민당]]
[[분류: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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