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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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은 한국 최초의 철도이다. 1891년 미국의 기업가 제임스 모스가 미국 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알렌]]을 통하여 조선 정부와 철도부설을 협의하였으나, 일본이 개입하여 일본의 자본으로 철도를 부설하는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을미사변]]으로 일본을 배척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철도 부설권은 다시 모스에게 넘어갔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이회한|2008년|page=60}}</ref> 모스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양여받은 직후, 인천에 거주하는 같은 미국인 타운센드(W. D. Townsend)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콜브란(Henry Collbran)을 기사장으로 하여 경인간 노선을 실측하였고, 1897년 3월 27일에 인천 우각현(쇠뿔고개, 오늘날 도원고개)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에 착수하였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2003년|page=153}}</ref> 모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철도 부설 자금을 모집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철도부설권은 결국 일본 자본이 모여 만들어진 경인철도합자회사에 팔렸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나채훈 박한섭|2006년|pages=135-136}}</ref> 1899년 9월 18일 인천역 ~ 노량진역 간 33킬로미터 구간이 개통되었다. 당시 개통된 역은 인천 - 축현 - 우각동 - 부평 - 소사 - 오류동 - 노량진의 7개 역이었다.<ref name="나채훈박한섭137">{{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나채훈 박한섭|2006년|page=137}}</ref>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개통되었고 사흘 후인 7월 7일 [[서울역]]까지 연결되어 서울-인천간 철도 교통이 완성되었다.<ref name="고종석">고종석, 《히스토리아》, 마음의산책, ISBN 8989351383, 278쪽</ref> 경인선은 개통초기 하루 2회 왕복하였으나 전구간이 개통되면서 하루 5회 왕복 운행되었다.<ref name="나채훈박한섭137" />
 
[[파일:A model of train to run Gyeongin line at 1897.JPG|600px|thumb|center|경인선 초기에 운행된 모갈탱크기관차의[[모가형 증기 기관차]]의 모형.]]
 
제물포에 제일 처음 도입된 근대적 통신은 [[전신]]이다. 청나라는 조계지와 본국간의 연락을 위해 전신을 설치하였다.<ref name="ReferenceA"/> 한편, [[전화]]는 조선의 필요에 의해 개설되었는데, 조계지역을 관장하는 인천감리서와 조정사이의 연락을 위해 가설되었다. 한국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청나라에 파견된 유학생 상운이 1882년 3월 제물포항으로 귀국하면서 가져온 것이 시초이나, 실제 통화를 위해 개설된 것은 1898년 무렵으로 보인다. 가장 오래된 통화 기록은 14898년 1월 28일 인천 감리가 외아문(外衙門)에 “오후 3시에 영국 범선 3 척이 입항할 것”이라고 보고한 것이다. 일반인이 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으로 일본이 서울-인천 간 전화를 불법으로 가설하려하자 조선이 서둘러 사업을 시작하였다.<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조우성|2004년|pages=56-57}}</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