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승 (화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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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경기도]] [[개성시|개성]]의 지주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는 6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바로 밑의 동생이 유명한 조각가 [[김경승]]이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인 김인승은 [[1932년]] [[도쿄]]로 유학하여,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1937년]]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나부(裸婦)〉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초기의 작품 경향은 데뷔작 《나부》와 같이 사실적인 여성 인물화 위주였다.
 
그러나 그가김인승이 작품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8년간 전쟁을 치르던 기간이었다. 그의 인물화에도 정치색이 짙게 깔리게 되었다. 이 기간 중 김인승은 〈간호병〉(1944), 〈조선징병제시행기념 기록화〉(1943) 등 친일 작품들을 남겼다. 수채화인 〈간호병〉은 [[조선식산은행]] 사보인 《회심》(會心)의 속표지화로, 군복 차림의 일본군 간호병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징병제시행기념 기록화〉는 친일 미술인 모임인 [[단광회]](丹光會)에서 집단 제작한 대작이며, 전쟁 지원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대표적인 친일 미술 작품이다.
 
[[1940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000년 봉축기념전'에서 입선하였고, 몸은 비록 후방에 있지만 미술로서 전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열린 시국 전람회 [[반도총후미술전]]에 추천 작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김기창]], [[심형구]], [[장우성]] 등이 반도총후미술전의 추천 작가들이다. 그는 이들중 심형구와는 도쿄미술학교 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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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김경승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어용 친일 단체로 당시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인 [[계광순]]이 이사장을 맡은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서양화부 평의원이었고, 김경승은 조각부의 평의원을 맡았다. 이 단체는 다른 분야 친일 예술 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로 들어가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는 일도 하였다.
 
특히 김인승은 [[일제 강점기]] 동안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때 일본식 독음에 따라 'Jinsho, Kin'이라고 적었고, 연도는 황기(皇紀)로 적어넣는 등 자발적인 친일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정운현
|제목=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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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SBN 9788985548465
|장=남산 백범 동상을 바꾸어야 하는 이유 - 미술가 김인승·경승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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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이와 같은 경력으로 광복 후에 적극적인 친일 미술인으로 꼽힌 김인승은 [[조선미술건설본부]] 창설 때 배제되는 등 잠시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나, 친일 청산 문제가 흐지부지되면서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어 이후 학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미술협회]] 한국위원장 등으로 한국 화단의 대부로 활동했다. 특히 서양화의 구상 계열에서 그의 영향력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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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SBN 9788971990131
|장=김인승 :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이태호)
|꺾쇠표=예
}}
* {{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