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스 뉴턴 알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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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전파 쉽게 한 배경이란 소리,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반대했단 소리는 근거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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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선교사가 되다 ===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하여 [[웨슬리언 대학교]] [[신학]]과,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83년]] [[미국]] [[장로교]]회 의료 [[선교사]]로 [[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다시 [[장로회]] 본부에 [[조선]]행을 요구하여 [[1884년]] [[조선]]에 왔다. 당시 [[주한미국대사]] [[루시어스 푸트]]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조선]] 땅에서 [[선교사]] 신분을 내세우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앨런을 '미국공사관부 무급의사(Physician to the Legation with No pay)'에 임명했다. [[조선]]에 도착한 지 3개월 뒤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고 [[빈사]] 상태에 빠진 [[민영익]]을 수술이 계기가 되어 [[제중원]](처음에는 [[광혜원]]이라 함)의 설립과 함께 [[왕실]]의 의사와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1885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최초의 서양 [[병원]]인 [[광혜원]]을 세우고 그로 하여금 서양 의술을 가르치게 하였다. [[개신교]] 선교사인 [[호러스 뉴턴 앨런]]과 [[조선]]왕실과의 친밀한 관계는 [[개신교]]가 [[조선]]왕조의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들을 낸 [[가톨릭]]과는 달리 [[선교]]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 조선과의 인연 ===
[[1887년]] [[참찬관]]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의 고문으로 [[미국]]에 가서 [[청나라]]의 간섭을 규명하고 독립국 사신의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등 독립국으로서의 [[조선]]의 처지를 [[국무성]]에 밝혔다. [[1890년]]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어 외교 활동을 했고, 총영사·대리 공사 등을 지냈다.
 
[[1892년]] 이래 <코리안 레포지토리>를 간행하고, [[1897년]] [[전차]]·[[전등]] 등에 관한 설치권을 [[미국]]에 넘겨 주었다. [[1900년]]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 [[조선]] 지부를 결성하여 회보를 발행하는 등 문화 발전에 공로가 있었다. [[1902년]]부터 《[[한국 위보]]》를 간행했다. [[1904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으로부터 훈 1등과 태극 대수장을 받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실제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경위는 당시 [[가쓰라-태프트 밀약]] 에 반대하다가 [[미국]] 정부에 의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된 경우이다.)
 
== 평가 ==
[[한국]]의 의학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는 하나, 식민주의적 [[한국]]의 이권침탈에 안내 역할을 한 정치적 인물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자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이 [[한국]]의 독립 보전에 관심이 있었던 ‘친한적 인물’이 결코 아니다”며 “그의 외교정책의 기본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만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ref>김기정.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의 역사적 원형과 20세기 초 한미관계연구”, 《문학과 지성사》, 2003, p.212, 222</ref> 알렌은 [[1885년]] 4월 [[제중원]]이 만들어진 이후 동료 [[선교사]]들과 불화를 겪으면서 [[선교]]활동에 환멸을 느끼고 [[미국]]의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결과,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을 직접 획득해 [[미국]]인 사업가들에게 넘겼고, ‘노다지(no-touch)’라는 말을 만들어낸 [[운산금광채굴권]]은 40년간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을 채굴해 5600만 달러의 수익을 [[미국]]에 건네줬다. 또한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은 [[아관파천]]을 주선해 친미세력이 대거 등용된 뒤에는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냈는데 두달 만에 [[일본]]에 넘기면서 약 200만 원의 차익을 챙겼다. 이어 친미파 세력들이 결집력을 상실하자 [[미국]]의 이권에 호의적이었던 [[친일파]] 세력들을 간접적으로 후원했고, [[일본]]의 [[조선]]지배가 확실시 되었을 때에는 [[일본]]에 [[친미파]] 인사들의 명단을 넘겨주었고 이들에게 [[일본]]에 협력을 권고하였다는 점을 자부했다고 알려졌다.<ref>{{뉴스 인용|제목=앨런은 순수 의료 선교사가 아니었다|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17422|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강연석|날짜=1999-09-15|확인일자=2011-08-12}}</ref> 실제로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은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한 초기부터 [[조선]] 광산의 매장량, 위치 등을 조사했다. 그 광산탐사 보고서를 토대로 평북지방의 [[운산금광]]이 노다지 금광인 것을 확인했고, 그 채굴권을 [[미국]]회사에 넘겨주도록 [[조선]] 왕실에 요청했다. 또한 [[미국]]인 회사들이 [[조선]] 관료와 민간인들과 마찰을 겪을 때마다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은 자국민의 권리수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때문에 한미외교관계사 연구가인 [[손정숙]]은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을 ‘친한적’이라기보다 ‘[[미국]]적’인 [[미국]] [[외교관]]이라고 평가했다.<ref>손정숙. “[[알렌]], [[미국]]의 이권수호에 앞장선 [[미국]] [[외교관]]”, 《내일을 여는 역사》, 2006, p.130-141</ref> 이와또한, 함께하와이 [[1908년]]이민자 [[세브란스의학교]]모집 졸업생과정에서 7명에게사탕 주어진수수 [[의사면허]]농장의 발급을관리인에게 위해보낸 [[세브란스편지에 병원]]의의하면 제4대“조선인들은 병원장이던인내심이 [[에비슨]]은많고, [[조선통감부]]부지런하며, 통감유순한 [[이토인종이라 히로부미]]의그들이 협조를갖고 구했다.있는 이로오랜 인해복종의 [[이토습성 히로부미]]는때문에 이들의지배하기가 졸업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쉽다.<ref>앨런 이그레이조선인들은 클라크.중국인에 “에비슨비하면 전기:교육하기가 한국쉬운 근대족속이라.”고 의학의저평가를 개척자”,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9, p했다.287-288</ref>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에 대한 시각은 극단적으로 나뉘어 있다. [[한국]]의 의학에 많은 기여를 한 선구자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식민주의적 [[한국]]의 이권침탈에 안내 역할을 한 정치적 인물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은 의료[[선교사]]로서 [[한국]]의학발전에 공헌한 사람이지만, [[미국]]사람이기에 자신의 고향인 [[미국]]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어 친미파 세력들이 결집력을 상실하자 [[미국]]의 이권에 호의적이었던 [[친일파]] 세력들을 간접적으로 후원했고, [[일본]]의 [[조선]]지배가 확실시 되었을 때에는 [[일본]]에 [[친미파]] 인사들의 명단을 넘겨주었고 이들에게 [[일본]]에 협력을 권고하였다는 점을 자부했다고 알려졌다.<ref>{{뉴스 인용|제목=앨런은 순수 의료 선교사가 아니었다|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17422|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강연석|날짜=1999-09-15|확인일자=2011-08-12}}</ref> 이와 함께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 7명에게 주어진 [[의사면허]] 발급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의 제4대 병원장이던 [[에비슨]]은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협조를 구했다. 이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는 이들의 졸업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ref>앨런 이그레이 클라크. “에비슨 전기: 한국 근대 의학의 개척자”,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9, p.287-288</ref>
=== 미국 이권 수호 행적 ===
학계에서는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자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이 [[한국]]의 독립 보전에 관심이 있었던 ‘친한적 인물’이 결코 아니다”며 “그의 외교정책의 기본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만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ref>김기정.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의 역사적 원형과 20세기 초 한미관계연구”, 《문학과 지성사》, 2003, p.212, 222</ref> 알렌은 [[1885년]] 4월 [[제중원]]이 만들어진 이후 동료 [[선교사]]들과 불화를 겪으면서 [[선교]]활동에 환멸을 느끼고 [[미국]]의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결과,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을 직접 획득해 [[미국]]인 사업가들에게 넘겼고, ‘노다지(no-touch)’라는 말을 만들어낸 [[운산금광채굴권]]은 40년간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을 채굴해 5600만 달러의 수익을 [[미국]]에 건네줬다. 또한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은 [[아관파천]]을 주선해 친미세력이 대거 등용된 뒤에는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냈는데 두달 만에 [[일본]]에 넘기면서 약 200만 원의 차익을 챙겼다. 이어 친미파 세력들이 결집력을 상실하자 [[미국]]의 이권에 호의적이었던 [[친일파]] 세력들을 간접적으로 후원했고, [[일본]]의 [[조선]]지배가 확실시 되었을 때에는 [[일본]]에 [[친미파]] 인사들의 명단을 넘겨주었고 이들에게 [[일본]]에 협력을 권고하였다는 점을 자부했다고 알려졌다.<ref>{{뉴스 인용|제목=앨런은 순수 의료 선교사가 아니었다|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17422|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강연석|날짜=1999-09-15|확인일자=2011-08-12}}</ref> 실제로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은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한 초기부터 [[조선]] 광산의 매장량, 위치 등을 조사했다. 그 광산탐사 보고서를 토대로 평북지방의 [[운산금광]]이 노다지 금광인 것을 확인했고, 그 채굴권을 [[미국]]회사에 넘겨주도록 [[조선]] 왕실에 요청했다. 또한 [[미국]]인 회사들이 [[조선]] 관료와 민간인들과 마찰을 겪을 때마다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은 자국민의 권리수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때문에 한미외교관계사 연구가인 [[손정숙]]은 [[호러스 뉴턴 앨런|앨런]]을 ‘친한적’이라기보다 ‘[[미국]]적’인 [[미국]] [[외교관]]이라고 평가했다.<ref>손정숙. “[[알렌]], [[미국]]의 이권수호에 앞장선 [[미국]] [[외교관]]”, 《내일을 여는 역사》, 2006, p.130-141</ref> 이와 함께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 7명에게 주어진 [[의사면허]] 발급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의 제4대 병원장이던 [[에비슨]]은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협조를 구했다. 이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는 이들의 졸업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ref>앨런 이그레이 클라크. “에비슨 전기: 한국 근대 의학의 개척자”,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9, p.287-288</ref>
 
== 관련 문화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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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Authority control}}
 
{{기본정렬:알렌, 호러스 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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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장로교 선교사]]
[[분류:오하이오 주 출신]]
[[분류:연세대학교]]
[[분류: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동문]]
[[분류:태극장 수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