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 (190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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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일 = {{사망일과 만나이|1972|5|11|1900|10|20}}
| 장르 = 회고록 저술
| 국적 = [[대한민국]]
| 활동 기간 = [[1921년]] ~ [[1972년]]
| 필명 = 호는 철기(鐵驥), 자는 인남(麟男), 다른<br 이름은/> 호(號)는 철기(鐵驥) <br /> 일명(一名)은 '''왕운산'''('''王雲山'''), 인남왕인남(王麟男), 국근이국근(國根), 국진왕국진(國鎭)
| 학력 = [[국방대학교|대한민국 국방대학교|국방대학교]] 졸업
| 직업 = [[독립운동가]]<br/>[[군인]]<br/>[[정치인]]<br />[[저술가]]
| 소속 = 前 [[신민당 (1967년)|신민당]] 고문 <br /> 前 [[국민의당 (1963년)|국민의 당]] 최고위원 <br /> 前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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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사상에 감화된 아버지 이문하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그러나 당시 20여세 되던 노비 [[정태규]](丁太圭)는 이범석의 집을 떠나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다. 정태규는 어린 주인집 장남 이범석과의 정이 들어 집을 떠나기를 주저하였다 한다. 노비가 아닌데도 집에 두게 되어 지탄을 받게 되자 아버지 이문하는 [[정태규]]를 오씨 성을 쓰는 [[대한제국]] 육군 참령의 대대에 병사로 넣어 주었다. 정태규는 이후 [[박승환 (1868년)|박승환]] 대대의 전투병으로 근무하며 군복 차림으로 종종 이범석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
 
[[1907년]]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정태규가 정미 7조약이 강요한 군대해산에 저항하다 참살당하는참살되는 것을 보고 이범석은 항일을 결심하고 16세이던 [[1915년]] 경성고보 3학년때 중국으로 망명했다.<ref name="dongA.com">[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199511290300 dongA.com]</ref> [[1907년]] [[8월 1일]]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군대 해산명령이 하달되었다. 구한국 군대 해산령에 불복한 [[박승환 (1868년)|박승환]] 대대장이 자결하면서 대대 병력은 서울 시내의 일본 군대에게 돌격하여 교전하였으나 사살되었다. [[일본군]]은 경성의 민가에 무차별 난입하여 구한국 병사의 색출작업에 나섰고 이범석의 집에도 들이닥쳐 수색하였다. 그날 초저녁 병정이 쓰러졌다는 마을 주민들의 아우성소리를 듣고 누이 이씨와 함께 마을 어귀로 나갔다가 검은 바지에 붉은 동을 맨 군복차림이던 정태규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정태규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그는 복수심에 불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품게 되었다. 그는 후일 이를 '''신의 계시'''인지도 모르겠다고 회상하였다.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집안에 훈장을 초빙하여 [[한학]](漢學)을 배웠다.
 
10세에 부친 이문하의 재혼으로 계모 김해 김씨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뒤 20년 연하의 이복 남동생 이범혁이 태어났다. 유년기의 이범석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개구쟁이였으나, 그를 독립운동가로 키워 낸 것은 계모였다.<ref name="우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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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이범석은 [[신규식]]의 추천으로 [[중국]]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부의 총통 [[손문]]을 만날 수 있었다. 손문은 신규식에게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신규식을 통해 손문에게 소개되었다. 손문은 그에게 "사관학교에서 공부하겠다니 일본에 대항해 싸울 용기가 있느냐?"고 거듭 물었고, 그는 [[손문]]의 천거로 손문이 혁명간부를 양성하던 운남육군강무학교 기병과에 12기로 입학하였다. 그는 일본 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 배달무(裵達武), 김정(金鼎), 김세준(金世晙), 최진(崔震) 등의 청년들과 함께 [[상하이]]에서 배로 홍콩, 통킹, 하노이를 거쳐 운남철도를 타고 운남강무학교에 도착했다.
 
입학 당시 길림성 출신으로 위장하여 입학하였으나, 신원조회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신규식과 손문의 추천으로 [[중국중화민국]] [[윈난성윈난 성]]의 독군(督軍) [[당계요]]의 신원보증을 받아 연령을 2세 올리고 해외 화교 이국근(李國根)이라는 위장 명의로 중국군 정규사관학교인 운남 육군강무학교에 입교<ref name="기념사업회1"/> 할 수 있었다. 당시 이범석 일행의 국적을 알던 인물은 당계요만이 유일했다 한다. 6개월간 신병교육 수료 후, 기병과에 편입하여 32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육군강무학교 재학 중 그는 뒷날 중국군 장군 섭검영(葉劍英)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독군 당계요의 지시를 받은 강무학교장 정개문(鄭開文)의 특별 배려가 있었고, 그는 상하이를 떠날 당시 신규식의 훈시를 잊지 않고 운남강무학교 재학 중 학업에 정진하였다. 3학기 이후 부터는 계속 수석을 차지하였다.
 
축성학(築城學) 과목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공병과를 나온 유탁양(劉卓陽)이 강의 중에 '조선은 중국의 식민지였으며 현재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다. 사람들은 술만 먹고 자포자기에 빠져 있다.'는 말을 듣자 울분을 느낀 그는 목합을 들고 일어섰다가 동료 최진이 꿇어 앉혀서 다지 앉았다. 그때 그가 들고 있던 목합은 신규식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 후 남에게 뒤쳐지지 않으려는 각오로 소등 시간 후에도 담요를 덮어 쓰고 공부하였다. 그는 반우들의 도움으로 불침번에게 발각되지 않아 처벌을 모면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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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직후의 정치활동 ====
[[파일:Jang Kim Lee Ps 19450816.jpg|thumb|right|250px|국내 정진군<br />(좌측 네 번째부터 [[장준하]], [[노능서]], 김준엽, 한사람 건너가 이범석]]
 
 
[[1946년]] 봄, 귀국시에 [[광복군]] 육군 중장으로 귀국하게 되었다(그러나, 미 군정은 광복군들도 군인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게 하였다). [[1946년]] [[6월]] 이범석은 정식으로 귀국할 수 있었는데, 이는 [[김구]]가 아닌 [[이승만]]의 부름을 받아 귀국할 수 있었다.<ref name="ee225">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박경수 지음 | 돌베개 | 2006) 225페이지</ref> 6월 22일 비행기편으로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귀국 당일 [[돈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자 이승만은 그를 환대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공식, 비공식 행사에 그를 대동하였으며 내외 귀빈을 만날 때마다 이범석을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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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전:청산리 작전>
* <톰스크의 하늘아래>
* <철기 이범석 자전>(19911991년 유고집)
 
== 학력 ==
* [[장훈고등학교|경성 장훈보통학교]] 수료(이후 1956년 서울 장훈고등학교 명예 졸업)
* [[경성부|경성]] 장훈보통학교 수료
* [[춘천초등학교|강원도 이천보통학교]] 졸업
* [[경기도]] [[이천시|이천]]보통학교 졸업
* [[경기고등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 중퇴(이후 1956년 서울 경기고등학교 명예 졸업)
* [[저장 대학|중화민국 저장 성 항저우 체육학교]] 졸업
* [[윈난 대학|중화민국 윈난 육군강무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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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72년 죽음]]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반공주의자대한민국의 반일 감정]]
[[분류:민족주의자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
[[분류:대한민국의 민족주의자]]
[[분류:한국의 파시스트]]
[[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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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윈난 대학 동문]]
[[분류:국방대학교 동문]]
[[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분류:전주 이씨]]
[[분류:서울특별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