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릉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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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황해북도 개풍군 남포리 영안성에 있는 [[고려 태조|태조 왕건]]의 부모 세조 왕륭과 위숙왕후 한씨의 무덤이다.<ref name="han">[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1635&cid=46629&categoryId=4662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창릉〉항목]</ref>. 세조 왕륭은 897년(진성여왕 11년) 음력 5월에 금성군에서 죽었는데, 영안성 강변에 있는 석굴에 장사지냈다. 부인 한씨도 후에 합장하였으며, 훗날 '''창릉'''(昌陵)의 능호를 올렸다.<ref>《고려사》〈고려세계〉</ref>.
 
1217년(고종 4년) 음력 3월 세조의 [[재궁]]을 임시로 [[봉은사]]로 옮겼다가<ref>《고려사》권22〈세가〉권22 - 고종 4년 - 3월 - 세조의 관을 봉은사로 옮기다</ref> 1276년(충렬왕 2년) 음력 9월 다시 창릉으로 이장하였다.<ref>《고려사》권28〈세가〉권28 - 충렬왕 2년 - 9월 - 세조와 태조의 재궁을 창릉과 현릉에 이장하다</ref>. 한편 1365년(공민왕 14년) 음력 3월에는 왜구들이 창릉에 들어가 세조의 어진을 탈취하였으며,<ref>《고려사》권41〈세가〉권41 - 공민왕 14년 - 3월 - 왜적이 세조의 영정을 탈취하다</ref>, 열흘 후에 영도첨의 이공수를 시켜 위패를 새로 봉안하게 하였다.<ref>《고려사》권41〈세가〉권41 - 공민왕 14년 - 3월 - 창릉에 세조 위패를 새로 봉인하다</ref>. 이어 1392년(공양왕 4년) 음력 3월에는 창릉을 수리하였다.<ref>《고려사》권46〈세가〉권46 - 공양왕 4년 - 3월 - 창릉을 수리하다</ref>. 창릉에는 능의 수비를 위해 산직장상 2명을 두었다.<ref>《고려사》권83〈지〉권37 - 병3 - 위숙군 -각종 궁과 문을 수비하는 위숙군의 종류와 액수</ref>.
황해북도 개풍군 남포리 영안성에 있는 [[고려 태조|태조 왕건]]의 부모 세조 왕륭과 위숙왕후 한씨의 무덤이다<ref name="han">[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1635&cid=46629&categoryId=4662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창릉〉항목]</ref>. 세조 왕륭은 897년(진성여왕 11년) 음력 5월에 금성군에서 죽었는데, 영안성 강변에 있는 석굴에 장사지냈다. 부인 한씨도 후에 합장하였으며, 훗날 '''창릉'''(昌陵)의 능호를 올렸다<ref>《고려사》〈고려세계〉</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존급유적 제554호로 지정되어 있다.<ref name="han"></ref>.
1217년(고종 4년) 음력 3월 세조의 [[재궁]]을 임시로 [[봉은사]]로 옮겼다가<ref>《고려사》권22〈세가〉권22 - 고종 4년 - 3월 - 세조의 관을 봉은사로 옮기다</ref> 1276년(충렬왕 2년) 음력 9월 다시 창릉으로 이장하였다<ref>《고려사》권28〈세가〉권28 - 충렬왕 2년 - 9월 - 세조와 태조의 재궁을 창릉과 현릉에 이장하다</ref>. 한편 1365년(공민왕 14년) 음력 3월에는 왜구들이 창릉에 들어가 세조의 어진을 탈취하였으며<ref>《고려사》권41〈세가〉권41 - 공민왕 14년 - 3월 - 왜적이 세조의 영정을 탈취하다</ref>, 열흘 후에 영도첨의 이공수를 시켜 위패를 새로 봉안하게 하였다<ref>《고려사》권41〈세가〉권41 - 공민왕 14년 - 3월 - 창릉에 세조 위패를 새로 봉인하다</ref>. 이어 1392년(공양왕 4년) 음력 3월에는 창릉을 수리하였다<ref>《고려사》권46〈세가〉권46 - 공양왕 4년 - 3월 - 창릉을 수리하다</ref>. 창릉에는 능의 수비를 위해 산직장상 2명을 두었다<ref>《고려사》권83〈지〉권37 - 병3 - 위숙군 -각종 궁과 문을 수비하는 위숙군의 종류와 액수</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존급유적 제554호로 지정되어 있다<ref name="han"></ref>.
 
== 기타 ==
 
* [[벽란도]] 남쪽에 창릉포라는 곳이 있으며, 이는 창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대부분의 고려 왕릉이 산에 있는 것과는 달리, 창릉은 [[예성강]]의 강가에 있다. 이는 세조가 창릉포 바로 옆의 영안성을 본거지로 하여 활동했기 때문이다<ref name="han"></ref>.
 
== 출처 ==
 
<references/>
 
== 바깥 고리 ==
 
* [http://db.history.go.kr/KOREA/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史料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