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무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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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stco Xiamen off Vancouver.jpg|thumb|항해 중인 컨테이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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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무역'''(自由貿易)은 [[국제 무역]]에서 [[재화]], [[용역]] 등의 [[상품]]교역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무역 제도이다. [[소비자]]와 [[생산자]]간에 사고 팔리는 상품에 대해 [[세금]], [[관세]], [[비관세 장벽]]등으로 수입 가격을 높여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보호 무역]]에 대비 되는 개념이다. [[북아메리카 자유 무역 협정]](NAFTA), [[한미자유무역협정]]과 같은 [[자유 무역 협정]]은 양국 또는 다자간의 자유 무역을 증진시키기 위한 무역 협정이다.
 
==개요==
자유 무역은 [[데이비드 리카르도]]와 같은 [[고전경제학|고전경제학자]]들의 [[비교 우위|비교우위론]]을 근거로 정부의 간섭 없는 무역이 교역 국가 쌍방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유 무역은 다음과 같은 무역 조건이 충족되는 것을 말한다.
* 교역되는 상품에 대한 [[관세]] 및 [[세금]]의 철폐
* [[수입 쿼터]] 또는 수입 품목 제한과 같은 [[비관세 장벽]]의 철폐
* [[자본]], [[노동]] 등 [[생산 요소]]에 대한 세제 혜택 등 보호조치의 철폐
* 시장 정보 및 시장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
* [[자본]], [[노동]] 등의 자유로운 이동
 
==역사==
[[국제 무역의 역사]]에서 자유 무역의 개념은 근대 이후에야 성립된 것이다. 특히 [[데이비드 리카르도]], [[애덤 스미스]]와 같은 [[영국]]의 고전경제학자들은 16세기 유럽 각국의 [[중상주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자유 무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유 무역은 확대와 축소를 거듭하여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관세 무역 일반 협정]]과 이를 이어받은 [[세계 무역 기구]]는 자유 무역의 [[세계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왔다.
 
==자유무역의 흐름==
 
영국은 ‘산업혁명’을 이룩하여 세계 유일한 산업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영국은 인구가 적은 나라였다. 따라서, 공산품의판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절실했다. 당시 유럽 주요 국가들은 모두 보호무역의 색채가 짙은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영국도 마찬가지로 보호무역으로 가장 악명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영국은 전 세계에 ‘자유무역’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의 시장을 열기 위해 영국은 먼저 자국의 보호무역을 폐지하고, 상대국 역시 영국 제품에 대한 수입 제한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로써, 영국은 자유무역을 선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1. 아편전쟁
영국은 자유무역을 완강하게 거절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무력을 동원했다. 아편전쟁이 가장 전형적인 사례이다. 1840년, 영국은 중국의 아편 수입 금지 조치에, 침략전쟁을 발동했다. 영국산 제품이 중국에서 중국산 제품과 공정한 경쟁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밀매하려했다. 청나라 시대의 중국은 자급자족의 자연경제를 실시해왔으며, 쇄국정책을 고수해왔기에, 영국산 제품은 중국에 진출할 때 완강한 저항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의 대중국 수출 품목은 주로 방직 제품, 금속 제품과 인도산 목화로 한정되었다 대중국 무역의 주종을 이루는 방직 제품은 심각한 적자를 기록했다. 중국의 수공업제품이 영국산 제품에 못지않게 매우 정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은 중국산 차·생사 등의 상품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영국이 중국과 무역을 개시한 목적은 처음부터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영국은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강구했다. 이어 얼마후,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는 방법으로 중국과의 무역에서 승부를 뒤집으려고 시도했다.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대량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뇌물을 먹이거나 밀수를 하는 등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820년까지는 연간 4000상자의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수출했고 1839년에는 40000상자에 달했다. 1830년부터 영국의 대중국 무역 물량 가운데 아편 무역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영국은 아편 무역을 통해 대중국 무역적자를 흑자로 돌려놓았다. 중국은 해마다 은 1000만 냥 이상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면서 중국 경제의 균형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잇달아 일련의 사회문제까지 유발되었다. 더불어, 청나라 통치자들의 부정부패를 조장하였다. 이에 아편을 금지하는 문제가 청나라 정부의 최대 급선무로 대두되었다.
 
 
 
-제 1차 아편전쟁-
 
2년간 치열하게 전개된 제 1차 아편전쟁에서 중국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봉건 사회에서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진입하여 영토 할양, 문호 개방 등을 하게 되었다.
중국은 결국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전쟁 배상금 2100만냥을 지급할 것, 광저우·샤먼·푸저우·닝보·상하이의 5개 항구를 개방할 것, 영국에 협정세율 및 영사재판권을 부여할 것 등이었다.
1854년에 ‘난징조약’의 12년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다. 그러자 영국은 중국과 미국이 체결한 ‘왕샤조약’의 “12년 후에 무역 및 최혜국 대우와 관련된 조항을 재개정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인용해 청나라 정부에 ‘난징조약’의 전면 개정을 요구했다. 주요 내용은 개방 항구 확대, 아편 무역의 합법화, 수출입 화물에 부과하는 자구세 면제, 외국 공사의 베이징 상주 허가 등이었다. 청나라 정부의 거절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1856년, 중·미간 ‘왕샤조약’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지를 받아 재차 청나라 정부에 조약 개정을 요구했지만 청나라 정부는 거절했다. 이에, 서구 열강들은 중국에 대한 새로운 침략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제2차 아편전쟁-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군을 파견해 중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자 미국과 러시아도 잇달아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결과는 중국의 참패로 끝났다. 중국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와 각각 ‘톈진 조약’을 체결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는 대중국 침략전쟁을 확대하고 청은 다시 영국과 프랑스와 각각 ‘베이징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통해 최종적으로 중국에서 아편 무역의 합법화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중국은 아편을 수입하는 대가로 매년 은 3000만 ~4000만 냥이 외국으로 흘러나갔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대외무역과 관련한 자주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먼저 관세 자주권을 빼앗긴 데 이어 세관 행정권까지 상실했다. 서구 열강들이 강압적으로 중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한 결과, 중국의 수입 관세는 3.2%로 하락했다. 대량의 저가 외국 상품이 중국 시장에 밀려들어오면서 외국 기업과 양행들이 중국의 대외무역을 완전히 독점해버렸다.
 
2. 자유무역과 멀어지다
1870년대부터 시작된 ‘제2차 산업혁명’을 통해 독일이 새로운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당시, 독일 정부는 자유무역 정책을 실시하여 다수의 수입품에 제로 관세를 적용했다. 하지만, 이는 영국산 저가 철강이 독일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독일 시장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1879년, 독일은 본격적으로 보호 관세를 도입했다. 그러자, 독일은 수입이 감소하고 수출이 급증했으며 산업이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미국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미국 제조업 수입 관세는 줄곧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미국은 보호무역에 의존해 자국 시장과 산업을 보호했다.
신흥 산업 국가인 독일과 미국은 식민지를 확보한 다음, 식민지에서도 보호 무역을 실시했다. 이러자, 자유무역으로 세계 각국에 아무 문제 없이 수출되던 영국산 제품이 두터운 무역장벽에 부딪혀 거듭된 좌절을 맛보았다. 신흥 산업 국가들은 자국의 저가 제품으로 영국 시장을 점령하는 동시에 영국산 제품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해 자국 경제와 산업을 보호할 수 있었다.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세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영국은 방대한 군비지출로 인해 국가 재정의 균형이 무너지고 자유무역 정책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반면, 미국은 교전 양측에 군수품을 공급하면서 가장 많은 부를 얻었다.
국력이 약할 때는 자국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을 실시하다가 경제가 일정 정도로 발전한 다음에는 자유무역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다른 국가의 부상으로 인해 자국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면 다시 보호무역을 도입하게 된다.
 
3. 경제 대공황
1929년, 뉴욕의 증권거래소에서 누군가 갑자기 고평가된 주식을 매도해버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다른 투자자들 역시 앞다퉈 주식을 처분했다. 이런 매도 분위기는 주식 시장에 연쇄적인 도미노 효과를 불러와 뉴욕 증시는 갑자기 폭락하기 시작했다. 대공황을 이렇게 막을 열었다.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는 빠른 속도로 유럽 각국으로 번져나가, 세계 주요 국가를 휩쓰는 글로벌 금융 위기로 확대되었다.
경제 공황으로 더욱 더 큰 피해를 입은 영국은 자국 산업과 농업을 보호할 목적으로 자유무역 정책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4.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자유무역
금융 위기 발발 후, 미국은 전례 없는 곤경에 빠졌다. 미국의 후버대통령은 의회에 빠른 기간 내에 위기를 극복할 대처 방안을 내놓으라고 촉구했다. 이에 하원의 윌리스 할리 의장은 관세법안을 제출했다. 그는 이 법안에서 미국의 본토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 대상 품목 845종을 추가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법안은 하원을 통과한 후 곧 상원으로 교부되었다. ‘스무트-할리 관세법’이 공개되자마자 곧 미국 내 지식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대통령은 자신의 고집대로 ‘스무트 할리 관세법’에 서명을 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국제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전쟁을 중지하고 ‘협정관세’를 매기자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미국이 이 법을 발효하자 협정관세는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곧 관세 전쟁이 터질 상황에 이르렀다.
항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두 무시해버린 미국의 태도에 화가 난 각국 정부는 미국과 동일한 수단으로 반격에 나섰다. 캐나다를 비롯한 영국, 프랑스, 독일 역시 앞 다투어 관세장벽을 설치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취임할 당시, 미국은 경제 대공황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있었다. 그는 당시의 경제 현황을 냉철히 분석한 후, 국민들의 의지에 순응하는 일련의 경제 위기 극복 정책들을 대거 출범시켰다. 이를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라고 부른다. 핵심내용은 3R 즉, ‘Recover(부흥)’, ‘Relief(구제)’, 'Reform(개혁)'이다.
코델 헐과 루즈벨트의 적극적인 노력 끝에 미국은 1934년 드디어 ‘호혜 통상 협정법’을 출범시켰다. 이후, 미국은 많은 국가들과 협상을 통해 호혜 통상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 체결은 미국의 국제 관계 회복과 국제무역 재개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39년에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 결과가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자, 연합국 수뇌들은 전후 국제 경제 질서를 재편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941년,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대서양 북부 항구의 한 군함에서 ‘대서양 헌장’을 발표했다. ‘대서양 헌장’의 4조는 “양국은 기존 의무를 존중하면서 강대국이나 약소국, 승전국이나 패전국에 상관없이 모든 국가가 동등한 조건으로 무역 및 경제 번영에 필요한 세계 원자재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도록 노력한다”라고 규정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포기했던 자유무역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다.
1944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 등 44개국 특사와 대표들은 미국의 주도 아래 미국 뉴햄스펴 주의 브레턴우즈에 모였다. 이 회담의 목적은 무역자유화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다자간 경제제도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회담에서는 다른 나라의 통화는 달러와 고정환율을 적용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브레턴우즈 체제’이다.
브레턴우즈 회담에서는 무역 분야의 <국제무역기구 헌장>에 대해서는 의견 불일치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일명 ‘하바나 헌장’으로 불리는 <국제무역기구 헌장>에 반대표를 던진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 의회는 만약 국내 시장을 개방한다면, 다른 국가들의 상품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자국의 경제 이익에 피해를 줄까 우려하여 이 법안을 부결시켰다.
일각에서는 대국 사이의 관세 전쟁과 무역전쟁이 제 2차 세계대전을 유발한 원인의 하나이므로 전후에 자유로운 다각 무역 체제가 반드시 구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년, 각국 정부는 <하바나 헌장> 정신에 입각해 잠정 협정을 제정했다. 이는 의회의 심사 비준을 거치지 않고 각국 대표의 서명만 있으면 즉시 발표되는 정부기구 간 행정 협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관세 및 무역 협정의 잠정 적용 의정서’이다. 더불어, 각국 정부는 세계적인 무역기구이자 세계무역기구의 전신인 ‘GATT’를 설립했다.
GATT는 어느 국가던 함부로 관세를 인상하거나 비관세 장벽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규정했다. 이 규정을 어길 경우, 다른 국가의 경제 제재를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GATT의 설립취지는 각국이 상호 이익과 혜택을 전제로 관세 및 기타 무역 장벽을 대폭 줄이고 국제무역에서 차별 대우를 없애 무역 자유화를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이로써, 다른 국가의 시장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국 시장을 개방해야한다는 규칙이 마련되었다. GATT가 적용되는 동안, 세계의 평균 관세율은 4%이하로 크게 낮아졌고 상품 무역 규칙을 보완, 발전시키고 서비스 무역을 두루 포함하는 법률 및 제도적 기틀을 성공적으로 마련했다.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UR) 각료회의에서는 ‘GATT’를 대체해 ‘WTO’출범 문제에 합의했다. WTO는 회원국 사이의 분쟁을 중재함에 있어 그 어느 것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고, 상품·서비스·제적재산권 무역에 모두 적용된다.
이로써 글로벌 무역 루트가 막힘 없이 잘 통하고 세계 무역액도 10배의 성장을 가져왔다. 아울러 각국 간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크게 높여 글로벌 경제 일체화 과정을 단축시켰다.
 
 
출처 : <무역전쟁(CCTV 경제 30분 팀 지음)>
 
== 현황 ==
2011년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은 [[세계무역기구]]에 가입되어 있다.<ref>[http://www.wto.org/english/thewto_e/whatis_e/tif_e/org6_e.htm "Members and Observers"]. World Trade Organisation. Retrieved 3 January 2011.</ref> 가입현황은 아래의 지도와 같다.
[[파일:World Trade Organization negotiations.svg|600px|center|thumb|세계무역기구 가입 현황<br />{{범례|#007f00|회원국([[유럽 연합]] 가입국 포함)}} {{범례|#00ff00|통계 및 자료 공유국}} {{범례|#e8e800|재화·용역 거래 수락이 요청된 국가}} {{범례|#ff7f40|국외 무역 정책 각서 수락국}} {{범례|#7f4000|참관국, 국외 무역 정책 각서 협상중인 국가}} {{범례|#ff0000|최근 3년간 협상이 없었던 국가}} {{범례|#c0c0c0|세계무역기구와 공식적인 접촉이 없는 국가}}]]
 
==비판==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학 교수 [[장하준]]은 그의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비교 우위에 입각한 자유 무역이 이미 높은 경쟁력을 지닌 선진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비판하였다.
 
== 각주 ==
{{각주}}
 
==참고문헌==
* 김대식 외, 《현대 경제학 원론》,제11편 국제경제이론, 박영사, ISBN 89-7189-483-0
* 장하준(2002). 《사다리 걷어차기》: 선진국들의 성장 신화 속에 숨겨진 은밀한 역사, 부키, ISBN 978-89-85989-69-5.
 
==함께 읽기==
*[[비교 우위]]
*[[자유 무역 협정]]
*[[한미자유무역협정]]
*[[보호 무역]]
 
[[분류:국제 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