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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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2년]]([[조선 세종|세종]] 4년)에 흙으로 쌓은 곳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등 봉족(奉足)과 잡색(雜色) 32만 2천 4백 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대대적으로 성곽을 고쳤다. [[1451년]]([[조선 문종|문종]] 1년)에도 성을 고쳤지만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부서졌다. [[1616년]]([[광해군]] 8년)에 개수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졌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약조 중에 성벽을 쌓지 않고 보수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부서진 채로 방치되다가, [[1704년]]([[조선 숙종|숙종]] 30년)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주장으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까지 수축하였으며, [[1743년]]([[조선 영조|영조]] 19년)에 다시 고쳤다. 그밖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세종·숙종·순조 때의 것이다.<ref group="주">2016년 들어 교체된 한양도성 현장 안내문에도, 현재 남은 서울 한양도성은 주로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때의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숙종과 순조 때의 성곽의 특징에 대하여서는 현재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ref>
 
태조 시기에 지어진 성은 자연석을 거칠게 갈아서 사용하였으며, 아래쪽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로 축성하였다. 세종 시기에 지어진 성은 좀더 직각사각형의직사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으나, 돌과 돌을 갈아 자연스럽게 이으려 하였다. 숙종 또는 순조 시기에는 직사각형으로 돌을 잘라서 축성하였다.
 
=== 철거와 복원 ===